시로 보는 영화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다시 불 켜진 극장을 나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수많은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가 있을까 생각하며 결국 지금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되새김질한다. ‘고모레비’(나무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뜻하는 일본어)를 반복해서 찍는 히라야마처럼 우리는 언뜻 같아 보이지만 매번 다른 하루를 살아간다. 히라야마가 태어났을 때부터 화장실 청소부는 아니었던 것처럼 그가 가진 삶의 굴곡을 이해하는 건 결국 내 삶의 영역을 통해서다. 그렇게 숨겨진 이야기들을 통해 영화는 더욱 풍성해진다.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 그 생각의 방향이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면 관객은 다시 자신만의 영화를 한 편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는 건 내가 가진 상처를 통해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건 내 안의 삶이 진동했기 때문이고, 그건 대개 기쁨보다는 슬픔을 통해서다. <퍼펙트 데이즈>의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며,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히라야마’의 삶의 흔적을 상상해 보게 만드는 것. 그게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이지 않을까. 그래서 난 이 영화를 보며 이면우의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는 시를 떠올렸다.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였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작과 비평, 이면우)
‘히라야마’가 뚫고 나가려던 흔적이 내 가슴에 깊이 파였고, 그 흔적을 가지고 또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요 속에서 아무런 신체적 경험이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우리는 즉시 어떤 시간이 흘렀다고 가정한다.’고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진 건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