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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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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Feb 19. 2019

동거인 관찰일지 2


남편과 크게 한 바탕 말싸움을 했다. 힘겹게 화해를 하고 나서도 기분은 풀어지지 않았다. 수영이 끝났다고 젖은 몸이 금방 마르던가. 물이 다 말라도 수영장 냄새는 가시지 않는 것 처럼 화해를 하고나서도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침대 위에 누워서, '그와 나'에 대해 생각했다. 늘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양상으로 싸움을 반복하는 그와 나. 나는 급기야 슬퍼졌다.

'아. 우리가 만약에 먼 훗날에 이별을 하게 된다면, 바로 이 이유 때문이겠지?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를 끝내 좁히지 못하고 어느 순간, 우리 이제 그만하자, 말하게 되어버리는 거겠지?'

그와의 이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에서 힘이 빠지고 고개가 꺾였다. 등을 돌려 누운 채로 골똘히 생각했다. 우리가 헤어진다면. 내 옆에 네가 없다면. 상상 속의 나는 이미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얼 빠진 표정으로 방구석에 구겨져 있었다. 이별 후 내 모습이 폐인의 극치에 달했을 때, 등 뒤에서 그가 짐짓 과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휴~ 내 팔자야~ 이런 애랑 앞으로 한 오십 년을 더 같이 살아야 한다니이~"

뒤통수에 딱밤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정신차려 이 친구야. 이별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결혼하고 같이 산지 2년 하고도 반이 지났는데, 그는 아직도 뜻밖의 언행으로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 한 쪽으로 꺾여있던 내 고개를 스스로 번쩍 들어올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물론 상상 속의 일이었지만, 고작 말싸움 한 판에 결별한 모습까지 그리고 있던 내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다.


"언제 아, 이 사람이다! 하고 느꼈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듣는다. 주로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묻는다. (결혼을 겪어본 사람은 이런 질문이 사실 조금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꼭 떠올리게 되는 사건이 있다. 현 남편이 구 남친일 때의 일이다.


우리는 한국-미국 장거리 연애 중이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심각한 망상에 종종 빠져 들었다. 그 날 우리는 낮 동안 홍대와 합정을 쏘다니다가 해가 질 때 즈음에 숙소로 들어왔다. 잠깐 쉬면서 무한도전만 한 편 보고 다시 밖에 나가서 놀기로 했는데, 미국에서 날아온 애인은 시차 때문에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그의 감긴 눈과 벌어진 입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나는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얼마나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각자의 시간대에서 얼마나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런 내 기분을 너는 이해할까. 무한도전 속 사람들은 왁자지껄 웃고 떠들었고 혼자 보는 무도는 재미가 없었다.


나중에 잠에서 깬 그에게 내 우울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조심스럽게 마음 속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난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인 것 같고, 너는 완전한 남인 것 같고, 우리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게 아닐까 두려워. 나 너무 찌질하지? 이렇게 갑분우(갑자기 분위기 우울)인 나에게 너는 실망했니?' 같은 류의 전형적인 찌질이의 대사였다. 조용히 내 말을 듣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난 오히려 자기가 이런 말 해줄 때 되게 고맙던데. 자기 마음으로 들어가는 초대장 같은 걸 받은 것 같잖아. 아무나 못 받는거."


활자로 쓰고 보니 눈 돌리고 얼굴 가리고 싶을 만큼 오글거리는 멘트지만, 현장에서 라이브로 들었을 때 나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였었다. 나의 찌질한 생각을 특별한 초대장으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니!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남편의 진짜 재능을 알아봤던 것 같다. 여러 겹의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있는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내면까지도 힘들이지 않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능력. 내가 우울의 우물을 파고 들어갈 때 거짓말처럼 쉽게 나를 밖으로 꺼내어준다. 다만 본인은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재능은 오늘날 정신적 딱밤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런 딱밤이라면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마냥 좋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싸우고 있다. 물론 결혼 연차가 높아질수록 싸우는 빈도가 낮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한 번 싸우면 제대로 싸운다. 그리고 제대로 화해한다. 예전에는 밤 늦게까지 언쟁을 벌이다가 방과 거실에서 따로 잔 적도 많았는데, 요즘엔 그 날 싸운 것은 그 날 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숱한 싸움들을 통해 'agree to disagree' 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때가 (숱하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존중할 수 있게 (혹은 존중하려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연애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관계가 지금의 동거인과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남편의 딱밤 스킬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연애는 결혼 훨씬 전에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비빌 언덕이 하나쯤은 있어야 결혼이라는 결정까지 내릴 수 있는게 아닐까? 물론 그 결정 이후부터가 진짜 시작이겠지만.


<Birthday> Marc Chagall / 왠지 이 그림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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