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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Oct 02. 2020

로마인의 밥상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로마인은 육식 인종이 아니었다. 생선은 좋아했지만, 고기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전투의 연속으로 밀 보급이 끊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 로마인의 주식은 밀가루를 이용한 빵이나 밀가루를 주로 한 죽이었다. 야채나 과일은 좋아했다. 치즈나 우유, 양젖도 좋아했는데, 이것들과 생선이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모양이다.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은 고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로마인과 달랐다. 로마 병사들은 갈리아인, 특히 훗날 접촉하게 된 게르만족에게 체력으로 압도당하여 자주 열등감에 시달렸으니까, 고기를 먹어서 체위 향상을 꾀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전투는 체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해산물과 곡물, 치즈,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주로 먹는 지중해식 식습관을 버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로마 병사의 식사도 행군할 때는 우유나 양젖을 넣어끓인 죽이나 빵, 거기에 치즈 한 조각과 양파와 포도주 한 잔을 곁들인 것이었다. 이런 식사로 세계를 정복했으니 어이가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현대 서구인이 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선조가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이기 때문이다.


위 내용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 2권>에서 발췌한 제1차 포에니 전쟁 기간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에 대한 서술이다. (104 쪽 참고) 이 시리즈는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상황을 묘사하는게 매력이다.


로마인의 밥상은 어떠했는지, 또 그게 현대 이탈리아와 지중해 지역의 식문화에 어떻게 남아있는지 연결지어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유럽 대륙 안에서도 민족별로 식습관이 달랐다는 점도 신기했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식습관에 따른 체구 차이가 무려 2000년 전부터 뚜렷했다는 점이었다. 해산물과 곡류 중심의 식단을 유지하는 로마인은 육식 중심의 식단을 유지하는 게르만인의 체구와 체력에 자주 열등감을 느꼈다니. 한국에서도 식단이 서구화되면서 평균 신장이 커졌다고들 하는데, 그게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가 보다. 하지만 큰 체구가 무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밀 보급이 끊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었"던 로마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게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2000년 전 사람들의 발자취에 감명을 받아 나도 요즘 다시 채식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역시 쉽지는 않다. 이미 유명해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The Game Changers> 덕분에 육식 매니아인 남편도 채식의 장점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지만, 계란이나 치즈, 요거트 같은 것들까지 철저하게 먹지 않는 비건 식단은 단 하루라도 유지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채식주의자가 아닌 손님을 집에 초대하게 되면, 그들 입장에서도 메인 디쉬가 고기 요리인 것이 으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채식요리를 대접하기가 꽤 조심스럽다. 옆 사람이 맛있게 고기를 먹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섭취하는 육식의 양은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는 있지만, 내가 먹는 음식의 범위에 제한을 두는 일은 음식 자체의 유혹 때문에도, 또 주변 사람들의 권유 때문에도 지속하기가 어렵다. 오랜 기간 채식주의자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건 몰라도 그 강한 의지력 하나만큼은 높이 인정해줘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어야 한 끼 제대로 먹었다, 라고 생각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입맛을 전면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왜 채식이 건강에 더 좋은지나, 공장식 축산업이 어떻게 기후위기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비인간적인 축산업이 결과적으로 인간 사회에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책, 오디오, 영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그런 컨텐츠와 정보 자체만으로는 개인이 수십 년 간 지속해온 식습관을 바꾸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더 효과적인 채식 장려 방법은 지속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장 확실하게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단연코 시장 원리이다. 육류 소비와 관련된 사람들의 행동과 습관에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용해야 축산업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육류의 가격을 상승시켜 수요 감소를 노리는 것이다. 담배세나 주류세처럼 육류에 매겨지는 세금이 엄청나게 올라가면, 그 가격이 부담스러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대체제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육류 소비도 줄고, 공장식 축산업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육류에 높은 세금을 매길 명분은 충분하다. 대기오염의 가장 큰 원인이 소와 돼지가 내뿜는 메탄가스이고, 아마존 정글 파괴의 가장 큰 원인 역시 소 사육지 확보이다. 드넓은 산림이 소와 돼지의 사료를 재배하기 위한 경작지로 사용되기 위해 벌목된다. 공공재인 환경을 파괴하는 대가로 얻어지는 고기이니까, 고기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환경부담금의 형태로 세금을 걷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과도한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제재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라스틱 생산/소비 가격이 너무 비싸지고, 다른 친환경 소재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위치가 되어야 플라스틱 문제를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고기 먹는 날'은 값비싼 날이 되어야 한다. 그 대가가 한 생명을 도살하는 일인만큼, 귀한 사건이어야 한다. 먹방, 쿡방 컨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엔 채식주의자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공감하기 힘든 영상들이 꽤 많다. 관찰 예능이나 브이로그 같은 컨텐츠들에선 집에서 해먹는 각종 고기 요리, 즐거운 일을 기념하는 고기 파티가 만연하다. 고기를 저염식으로 먹거나 굽는 대신 삶아 먹으면서, '건강한' 요리라고 자랑스럽게 선보인다. 매 끼니 고기를 먹는 행위가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한 사회다. 건강과 환경에 나쁠 뿐만 아니라, '한 생명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루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고기를, 그토록 쉽게 사서, 쉽게 먹고, 쉽게 버리는게 이상하지 않은가? 값비싼 송로버섯 대하듯 소고기를 대할 수 있게 되면 최소한 공장식 축산업을 주무대에서 몰아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로마인의 밥상에서 지혜를 발견할 때다. 물론 당시의 로마인들은 2000년 뒤에 세계를 위협하는 적군이 기후위기와 바이러스 같은 것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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