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5주차의 기록
몇 주 전에는 친구네 부부와 캠핑을 다녀왔다.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기도 했고 배가 더 불러오면 캠핑을 할 체력도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최소한 첫 돌이 지나기 전 까지는 캠핑을 못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마지막이 될 캠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캠핑장의 공용 샤워시설에서 샤워를 마치고 텐트로 돌아왔는데, 친구네 부부가 아기에게 쓴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직 나도 남편도 한 번도 쓰지 않은 내 아가에게 쓰는 편지라니! 내가 그림을 끄적이던 스케치북에다가 즉석에서 써서 준 것이었다. 편지 머리말에는 태명 대신 우리 부부가 생각해놓은 아기 이름 후보 1위를 사용했다. '너의 생일에는 우리가 꼭 장난감 탱크를 사줄게~ 우리가 미리 봐놓은 모델이 있어.', '네가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으면 우리가 베이비시팅을 해줄 수도 있어~' 같은 소소한 내용의 편지였지만, 그걸 읽고 있자니 이제 아기가 곧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면서 눈물이 날 것처럼 감동이 밀려왔다. 아, 이제 너도 곧 한 명의 인간이 되는구나! 임신 말기까지 온 마당에 너무 뒷북치는 엄마인가.
이제 아기를 만나기까지 정말 몇 주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출산 전 준비물과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조바심이 든다. 작년에 둘째를 출산한 아는 언니에게서 대부분의 신생아 용품과 수유 용품들은 받아왔고, 아기 침대와 수유의자, 유모차와 카시트 같은 큰 물품들은 중고마켓에서 상태가 괜찮은 것들로 구매했다. 물건을 최대한 중고로 구비하려고 한 데에는 비용을 아끼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길어야 1년도 못 쓸 물건들을 새로 사고 버리자니 환경적으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지난 한 달 간 중고마켓 (주로 페이스북 마켓플레이스) 어플을 거의 매일 밤마다 들여다 보며 물건들을 구경했는데, 원래는 최저 비용으로 마련하려고 했던 물건들도 보다 보니 눈이 높아져서 고가의 브랜드 물건들로 사모으게 되었다. 물건을 살 때 쉽게 결정을 잘 못 하고 해야할 일이 있으면 잠을 뒤척이는 나로서는 이런 쇼핑도 엄청난 스트레스라, 준비물 리스트에서 하나 둘씩 완료 표시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새벽에 한 번 잠을 깨면 그 때가 세 시든 다섯 시든 상관없이 다시 잠들기가 어렵다. 흥분인지, 긴장인지, 걱정인지 모를 어떤 마음 상태에 지배되어 맥박은 빨라지고 머리 속은 갖가지 상념들로 가득찬다. 아기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지부터 시작해서, 아기가 태어나면 집안일을 할 여유도 줄어들테니 로봇 청소기를 미리 사둬야 할지, 아기 천기저귀와 가제손수건은 언제 세탁할지, 아기 옷은 삶아야 한다는데 그건 어떻게 하는건지, 그럴려면 아기 전용 빨래 세제부터 사야하는데, 빨래 건조기도 사서 설치해야 하는데, 아 우리 냉장고에 얼음 제조기 고장난 것도 얼른 고쳐야 할텐데, 육아휴직은 3개월로 잡아뒀는데 과연 현실적인 계획일까, 재택근무를 하면서 동시에 육아를 한다는건 어떤 생활일까, 한동안은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야할까, 등등, 생각은 쉬지 않고 그물처럼 사방팔방 뻗어나간다. 그물의 중심에는 한 달 후면 태어날 아기가 있다.
지금까지는 '아기가 나오기 전에 무조건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외식도 많이 해야지' 하는 마음이 커서 코로나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뉴욕시티에도 자주 나가고 주말마다 과잉 외식을 일삼았는데 (덕분에 최근 몇 달 엥겔지수가 엄청났다) 출산 예정일 D-100일이 지나고 나자 이제는 '빨리 아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내 아기가 아들이라는 사실도 아직 실감이 안 나고, 어떤 얼굴과 목소리를 하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성격은 어릴 적의 나를 닮아 자주 엄마를 찾고 누군가 말을 걸면 엄마 뒤로 숨는게 좋은 아이일까, 아니면 칭찬받고 싶어서 여기저기 나서는걸 좋아했다는 남편을 닮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마트에서 파는 제일 큰 수박보다도 큰 내 배를 어루만져 본다. 그러다 잠시 후에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직 '엄마'라고 불리기엔 어제의 나와 너무 똑같은 사람이 거기 서 있다. '어제의 나'는 '그저께의 나'와 너무 똑같은 사람이고, '그저께의 나'는 '그끄저께의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씩 되짚어 가다보면, 결혼 전의 나, 대학생 시절의 나, 고등학생이었던 나, 중학교에 입학하던 나...로 계속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분명 걷지도 못하는 갓난쟁이었던 내가 도대체 어느 시점부터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되어 또 다른 갓난쟁이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걸까, 하는 질서정연한 혼란에 사로잡힌다.
아기는 나에게 약 40주 간의 시간을 주면서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지만, 사실 400주의 시간이 주어져도 엄마가 될 충분한 마음의 준비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