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나이는 나보다 연배가 높지만 업무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알고 지낸 사이다.
50대 중반의 남성인데 처음 부고장을 받았을 때는 그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자세히 확인을 해보니 본인의 부고 소식이었다. 무척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랐다. 지병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고인의 소식을 자세히 알만한 지인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사망의 사인은 자살이라고 했다.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죽은 자만이 알 수 있을 뿐 과한 추측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남겨진 가족들과 그분을 아끼던 지인들이 얼마나 힘이 들까 심히 염려스러웠다.
나 역시 감정의 롤러코스터 위를 올라탔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위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대인들은 외로움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혼자 있을수록 긍정적인 마인드와 희망을 놓아서는 버틸 수 없는 게 현대인의 삶인 것 같다. 나 역시 2년간의 시간 속에서 혼자된 삶에, 형용할 수 없는 삶을 꾸역꾸역 버텨냈던 적이 있다. 지금은 힘들고 외로웠던 그 시간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홀로 외로움을 버티는 방법이 긍정적인 사고나 희망이 없이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꾸역 꾸역이라도 버텨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서서히 변해갔고 지금은 혼자라도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제 완전히 적응이 되어버린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의 내 모습이나 내 삶이 싫지 않으니 잘 버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금 이 순간에 성장의 시간으로 자신 있게 기록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 때는 외로움에 부정적인 생각과 우울감에 빠져 타인에 기대어 극복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과 만나서 웃고 떠들었던 그 시간이 지나면 공허함만 더 커질 뿐이었다. 마치 폭주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나를 내던진 기분이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나 부모님 또는 애인에게도 말 못 할 사연이 있을 수 있다. 결국 혼자 견디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 같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거들뿐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은 나만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 외로움이나 부정적인 생각 그리고 이별의 후유증, 우울감 등 어쩌면 암보다도 더 무서울 수 있는 불치병을 글쓰기를 통해 극복을 했다. 나의 얘기를 내가 귀 기울여 들어주고 바뀌고자 노력하는 나를 객관화해서 바라봐주다 보니 점점 긍정에너지가 생기고 희망이 생겼다. 아마도 삶의 의지가 본능적으로 그렇게 만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잘 보살펴야 한다. 특히나 마음이 곧 깨질 것 같은 얇아진 유리벽 상태라면 더 잘 살펴야 한다. 타인에게 나의 마음을 의지하기에 앞서 먼저 나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며 오늘도 작은 것에 희망과 행복을 발견하는 글로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