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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용 Jan 14. 2024

아시아 화교 이야기

10. 화인의 엔터테인먼트 사업     

진씨네 18형제자매 중 제일 큰 아들은 두부공장을 물려받아 운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신 둘째가 공장을 맡아했다. 두부공장을 맡아한다는 것은 어머니 메이와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메이의 결정에 순종을 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녀가 창업 시부터 주관했던 공장일을 그녀를 넘어서 결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착한 둘째는 아침저녁으로 집안에 모셔놓은 불당에서 기도를 하며 염불을 암송한다. 사람들이 둘째는 절에 들어가 중으로 살아야 할 사람인데 길을 잘못 들어 두부공장을 맡아한다고들 한다. 그는 장가도 가지 않고 평생을  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살았다.

말이야 그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지만 실상은 어머니가 둘째를 돌보는 턱이다.

18명의 자녀를 탈없이 고스란히 키워 냈다는 것은 탁월한 그녀의 능력이었음을 어찌 부인하랴? 일요일에는 거의 모든 자녀들이 두부공장에  들려 점심을 먹는다. 자녀들 뿐만 아니라 손주들 까지도 들쑥날쑥 드나든다. 어떤 손주가 언 듯 눈에 뜨인 것 같았는데 없어지고 또 다른 손주가 나타나곤 하는 두부공장의 일요일  모습이다.

맏아들 첫째는 대만에서 게임기를 들여다가 여기저기에 설치하여 운영하는 일을 했다.

70년대 게임기는 동전을 넣고 작동하는 기계식이다. 미국에서 시작하고 일본에서 꽃을 피운 1세대,  2세대 게임기이다. 세계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런 게임기에 열광했었다.

70년대 후반에 내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갔었을 때  혼자 프랑크푸르트역 앞길을 걷다가 무료하기도 하여 게임숍에 들어가 동전을  넣고 게임을 했다.

한국에서 보는 게임기와 독일에서 보는 게임기는  프로그램은 좀 다를지언정 동전을 넣고 기계를 작동시키는 방법은 차이가 없어 별로 낯설지 않다. 그런데 동전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작동을 하지 않아 무엇이 잘못되었나 하고  요리보고  저리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보고 있다가 나를 도와주러 왔다.

그 사람도 별수가 없었던지 그냥 기계를 쿵쿵 때려 진동을 주는 게 고작이었는데, 동전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 모습은  반갑게도 한국사람 모습이다.

"한국 사람이지요?" "아,  네."  당시에는 한국인을  어느 외국의 거리에서 만난다는 것은 별 일이었던 때였다. 그 친구와 얘기하는 도중에 그가 현대건설의 현지 채용직원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번뜩 기억나는 게 있어,  그러면 허 아무 개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허 아무개는 대학에서 과는 다르지만 말을 놓고 지내는 친밀한 동창이기도 했고 현대그룹의 입사동기이기도 하다.  유럽 어디의  현대건설  지사에 파견 나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는데 그 친구 왈,  " 제 상관인데요." 한다. 그가 즉시 동창한테 전화를 걸어 나를 알렸고 다음날 아침 동창이 차를 가지고 와서 나를 픽업하고 라인강변으로 뻗어 있는 아후토반을 달려 만하임을 지나 로렐라이 언덕에 있는 전망이 기가 막힌 호텔에서 식사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라인강변에 수없이 많은 그림 같은 와이너리의 한 곳에서 주전자 와인도 마셨다. 그래서 인생은 살맛 나는 때도 있는 것이다.

게임기로 인한 풋풋한 젊은 날의 추억의 한 장(章)이다.     

진씨네  맏아들은 게임기를 설치할 장소가 큰 곳이든, 협소한 곳이든, 가능한 장소라면  협상을 해서 게임기를 설치했다. 방콕시내의 70여 군데에 게임기를 설치했다.

심지어는 단 한 개의 게임기 밖에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한 장소도 있었고 수십대에서 백여 대까지 설치하는 대형 게임장도 있었다. 당연히 게임기에서 나오는 동전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아버지 첸이 차오저우에서 들어와  코랏에서 숯을  구우면서 살아남아 그가 낳은 18명의 자녀의  맏이 아들은 그렇게 게임기로 돈을 벌었다.

돈을 많이 번 그가 하는 일은 그의 집에 차방(茶房)을 차려놓고 차를 달여 마시는 일이다.

웃통을 벗어 제친 벌거숭이로 차방에  앉아 하루종일 차만 마시는 일이 일상이다.

그러나 그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마카오의 카지노를 드나드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마카오를 안 가겠다고 선언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리고 다시는 홍콩행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집에서 셋째 아들만큼 독특한 캐릭터는 없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해서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어릴 적에 학교 가기를  싫어해서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않았다. 그 대신 거칠게 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30대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사설 카지노를 차렸다. 말이 사설 카지노지 카지노를 허용하지 않는 태국 법률에 위배되는 불법 노름장이다. 경찰 또는 군인, 조폭이라고 할 수준의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사업이다.

그러나 카지노 운영은 오래 하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한국 속담을 그가 알리가 없지마는 하여튼 단시간에 목돈을 벌고 미련 없이 접었다. 그리고 당시 주택사업이 호황인 때라 

방콕,  치앙마이,  파타야 등지에서 소형평수의 콘도(아파트)를 지어 팔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때가 있으면 좋지 않을 때도 있는 법, 경기가 안 좋아졌고 방콕 시내에 지어놓은 콘도 대여섯동이 분양이 안되어 한동안 비워 둘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그의 뒷 배경을 이용해 그  비워둔 콘도를 대형 마사지 숍으로 바꾸었다. 인테리어를 전부 바꾸어 초대형 마사지 타운으로 바꾸었는데 태국 전통 스포츠 마사지가 아니라 섹스마사지로 바꾼 것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 엔터테이너(?)의 숫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는 그런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어놓고 불과 몇 달 동안만 운영하고 제삼자에게 팔아 버렸다.

사실상  콘도 분양이 끝난 것이다. 프리미엄까지 붙여서. 그 후 그 마사지 타운이 말썽 없이 제대로 운영되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 후에  차원이 다른 최고급 마사지 숍을 다섯 개나 운영하는 마사지업계의 대부가 되었다. 최고 전성기에는 여자 엔터테이너 숫자가  700명에 이른 때도 있었다. 중국 화인이 19세기부터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독점했었던 명맥을 진씨네 셋째가 잇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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