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광용 Sep 23. 2023

아시아의 화교이야기

2. 태국의 왕조와 차오저우 중국인


입헌군주국 태국의 현재 왕은 와지라롱콘(Vajiralongkorn)이란 이름을 가진  라마 10세이다.

지난 2016년 서거한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의  유일한 아들인 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푸미폰 왕은  1946년에 왕위에 올랐으니까 무려 70년을 재위했다. 태국의 왕은 정치적으로는 실권이 없지만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어 국민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푸미폰 왕은 역대 왕 중에 가장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이십여 년 전쯤일까? 내가 한국에서 온 친지를 데리고 왓푸라 깨우 왕궁 관광을 갔었는데 

거기에서 운 좋게도 푸미폰 국왕과 왕비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왕 내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손에  20밧(800원) 지폐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왕에게 헌금을  하고 있었다.

내 기억에 왕의 근접거리에서 왕을 에워싸듯 하고 있는 경호원이나 수행원은 본 기억이 없다. 왕은 표정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백성들이 치켜들어 헌납하는 소액의 돈을 일일이 손으로 거두고 있었다. 글쎄,  그것이 연출된 이벤트인가? 아니면 늘 자연스레 일어나는 국민과의 소통인 가는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은 너무 보기 좋은 광경이어서 지금까지도 기억을 하고 있고 푸미폰 왕에 대한 신뢰를 더하고 있다.

푸미폰 왕은 그 자신이 농학박사이다. 농업국인 태국에 그가 새로이 개발하여 퍼뜨린 농업기술이 적지 않다고 한다. 태국은 정치적 고질인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수시로 바뀌어 왔는데 쿠데타에 성공한 어느 정권도 왕의 재가를 반드시 받고 내각을 꾸렸다.

왕이 성공한 쿠데타에 대하여 쿠데타를 철회할 정도의 딴지를  건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법적으로 군주의 실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처신한 것이다.

태국  영화관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왕의 동정을 담은 동영상과 함께 국왕 찬가가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일어서서 경의를 표한다. 우리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경의지만 태국은 왕에 대한 경의다.

현재의 왕조를 차끄리 왕조라고 한다.

차끄리 왕조는 1782년  라마 1세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1932년 군사 쿠데타로 전복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명목만 이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왕에 대한  지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다만 현재의 왕 와지라롱콘에 대하여는 분명 푸미폰 왕에 대한 신뢰와는 다른 여러 부정적인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거의  우선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왓프라깨우'라고  일컫는 왕궁과 에메랄드 사원이다. 태국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태국예술과 건축물을 상징하고 있는 곳이다. 이 왕궁은  톤부리 왕조의 장군 차끄리가 군사 쿠데타로 딱신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 라타나코신 왕조를 세웠는데 이를 장군의 이름을 따서 차끄리 왕조라고도 불린다.

그가 라마 1세 왕이다. 수도를 톤부리(지금의 방콕시 톤부리구)에서  차오프라야 강 건너  라타나코신으로 옮기고 거기에 왕궁을 세웠다. 그 왕궁이 왓프라깨우이다. 그 왕궁은 라마 1세부터 1925년까지 왕이 거주했다. 지금은 어떤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나  가끔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고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댄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인들  이야기이니까  왕조와 화인이 무슨 관계가 있나 하고 의구스럽겠지만 관계가 있다. 

톤부리 왕조를 세운 딱신은 아유타야 왕조를 재건한  사람이다. 차오푸라야 강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두세 시간을 올라가면  아유타야라는 곳에 이르는데 그곳이 타이인의  강력한 왕국의 수도가 있던 곳이다.

아유타야는 타이인의 최초 왕국이라고 역사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데 1351년에 유통(U Thong)이란 사람이 세웠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유통이 부유한 중국 상인의  아들이라는 설도 지배적이다. 14,15세기 당시에는 남쪽 폐차부리에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은 그들이 떠나온 중국과 매우 왕성하게 교역을 했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의 왕국 아유타야는 중국과 활발한 조공무역을 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타이 사회에서 정치적 권력이 필요했던 사람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권력을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돈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면 중국 화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유타야는 근방의 많은 소 왕국들을 지배하기에 충분한 강대 세력으로 군림을 하였지만 주변의  세력들 또한 경제적인 이유로라도  끊임없이 공격을 해왔다.

그러다가 더 힘이 세어진  미얀마에게  멸망을 당했다. 그리하여 타이족에 의한 왕국은 사라지고 미얀마의 몽족에 의한 지배를 받게 된 민족적 좌절의 시기에 아유타야의 후예라고 하는 딱신이란 사람이 아유타야를 떠나 차오프라야 하류로 내려와  톤부리에 도착하여 군대를 끌어 모으고  왕국을  세웠다. 그 왕국이 톤부리 왕국이다.

그런데 그 딱신이란 사람이  중국 차오저우(潮州)의  청하이  출신 아버지와 타이족 어머니에게서 난 중국인 후예이다. 그 사실로 보아서 태국의 화인들의 절대다수가 차오저우 출신이란 것이 우연이 아닌 듯싶다.

그러면 딱신을 제거하고 차끄리왕조를 세운  차끄리 장군은 또 어디 출신인가?

차끄리  장군의 아버지는 아유타야의 부유한 화인의 후예이고 어머니는 광동출신 화상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도 중국인이다.

라마 9세 푸미폰 국왕도 생전에 중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을 애써 부인한 적이 없다고 한다. 라마 1세 초기부터 라마 3세 시기까지 많은 중국인들이 몰려와 현재  차이나타운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상당수가 차오저우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태국의 역대 왕조와 왕가 또는 정권은 중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정치는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그 돈으로 왕조도 세우고 정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작가의 이전글 아시아 화교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