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이면 둘째 아이를 볼링장에 보내놓고 남편과 둘이 황토길을 함께 걷는다. 물론 손잡고 걷기 이런건 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속도와 보폭대로 걷는다. 느린 나를 항상 앞에 세우고 남편은 느즈막히 따라 온다. 축구와 크로스핏으로 단련된 이 남자에게는 왕복 40분의 산책일지 산행일지가 너무나 쉬운 코스다. 하지만 나에게는 꽤 숨가픈 코스이다.
일주일간의 피로와 숨가쁨과 이러저러한 여러 감정들을 잠시 내려놓고 초록의 잎에 눈을 씻으며 진붉은 황토길을 따라 걸으면 머리속이 쨍하고 맑아지는 기분이다. 맑은 공기에서 정말 피톤치드라는 게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돌아오는 길에는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산책코스 근처에 절이 있는데 오늘은 목탁소리와 불경 외는 스님의 소리가 양쪽에서 서라운드로 시간차를 두고 들려서 그런지 마치 랩을 하는 듯이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순간 장난기가 올라와서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야, 나 비구니로 살았어도 잘 살았을거 같지 않아?"
남편이 팔을 크게 위아래로 내리치며 말한다.
"여보는 이걸로 많이 맞았을거야. 죽도인가? "
나도 모르게 빵 터졌다. 뭔가 약이 올라 큰 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왜?"
"여보는 욕심도 많지, 아침잠도 많지."
부인할 수 없는 멘트에 내가 덧붙여 대답한다.
"밤잠까지 많지."
그래 부인할수 없구나. 욕심 많고 잠 많은 여자는 속세를 떠나 절에서 살았어도 주지 스님에게 혼 많이 나면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여보, 나 비구니로 살았어도 팔자라는 건 무시할수가 없어서 동자승들 키우고 돌봤을 거 같아."
내 삶에서 돌봄은 빠지지 않는 키워드였다. 물론 모든 유부녀들이 그랬겠지만 유독 나는 더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방학때는 6살짜리 이종사촌 동생을 겨울 방학 내내 돌봐주러 경기도 부평의 외삼촌댁에서 지냈더랬다. 긴긴 겨울 방학동안 의도치 않은 남의집 더부살이를 하며 나는 남을 도와주면서도 눈치밥을 먹고 지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두달간 버텨내며 인생의 참 맛과 쓴맛을 참 빨리도 알아버렸다.
아침에 외삼촌과 외숙모가 출근을 하고 나면 사촌 동생에게 그림책도 읽어주고, 점심밥도 챙겨주고 하루 한번 꼭 데리고 나가 산책겸 호떡을 사주고 돌아오곤 했다. 외숙모께서 매일 500원씩 주고 가셨는데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만족도 높은 활동?!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사촌동생은 잘 자라 수의사가 되었고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밟으러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때 내가 유독 많이 읽어주었던 자연관찰 그림책의 지분이 0.00001퍼센트라도 있지 않을까 혼자 흐뭇하게 생각하며 잘 자라준 사촌동생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평생을 아파 수족을 못쓰게 되셨던 아버지의 양치를 시켜 드리고, 배즙을 떠 먹여 드리고 식사를 위해 밥을 입에 넣어드리고 하는 일은 초등학생인 나에게 당연한 일과였고 나는 그 일을 꽤 즐겼다. 돌봄의 대상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결혼하고나서는 두 아이를 보살폈고, 일하면서 어깨 수술을 하신 어머니 수술 바라지를 하고 수술 전후로 두 달 반을 우리집에서 모시면서 돌보아 드렸다. 친정언니가 그 사이 수술을 두 번하게 되어 멀리 경상도로 내려가 며칠간 간병을 하였다. 남편의 발 수술과 큰 아이의 두번의 입원. 내 삶에서 돌봄이란 키워드를 지워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삶은 돌봄에서 시작해서 돌봄으로 끝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돌봄으로 삶을 시작해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는 것으로부터 인생은 마무리된다.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일 것이다. 돌봄을 잘 하는 것도 능력이요, 돌봄을 잘 받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다. 어쩌면 근래들어 초등교사에게 요구하는 능력도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에 더해 잘 돌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황토길을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아스라이 목탁 소리와 불경 소리로만 존재감을 드러내던 절이 보이고, 주차된 우리 차가 저 멀리 보인다. 볼링 수업이 끝났을 둘째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다. 속세를 잠시 떠났으나 어찌할 바 없이 금세 속세로 돌아온 나는, 산세의 정기도 받았겠다 다시 힘을 내어 이 속세 속에서 잘 살아가보자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