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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파벨로 파블리코프스키

절대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있다.

by 글너머

보통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문다. 보통 그렇다. 마음에 난 상처도, 결국엔 낫는다.

시간이란 것에 기대다 보면 상처가 그 전보단 쓰라리지 않을 거란 것에 애써 위로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자주 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피할 길은 없다.

그래서 결국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있다. 절대 낫지 않는.

곧 수녀가 될 의식을 앞두고 있는 안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이 성직자가 되기 이전에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만나라는 다른 수녀님의 뜻에 따라 이모를 만나게 된다.

이모는 한 마디로 안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미 등을 지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는 이모는 안나와 절대 가까워 질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아기 때부터 수녀원에서 생활했던 이다는 그런 이모에게 거리감을 느끼지만 그런 이모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안나의 이름은 '이다'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2차 세계대전에서 폴란드의 유대인들 또한 가혹하게 몰살당했으며 이다의 부모님도 그 악의 구렁텅이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음을.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이모와 함께 부모님의 유골을 찾는 여행 아닌 여행을 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화면의 여백을 매우 많이 남겨놓는다. 그리고 매우 정적이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 안의 인물들은 그마저도 구석에 위치해 있다.

절대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다의 이모,

그녀가 그동안 지니고 살아와야 했던 마음 속의 텅 비어버린 여백처럼. 정체되어 버린 그녀의 삶과 함께.

여행의 끝은 역시 아팠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마주쳐야 했던 그 때의 흔적들을.

그 흔적들을 마주해야만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상처들은 결국 이모의 마음에선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결국 상처에 지고야 마는 걸 끝까지 목격해야 했던 '이다'는 영화의 끝자락 쯤, 그녀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이모의 술과 담배를 시도한다.

난 그게 마치 '이다'가 수녀원에서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진짜 세상의 상처를 보고 삶의 덧 없음을 느끼는 것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수녀원에 돌아오고 나서도 마치 '하느님에 의해 보호받고 있던 세상은 단지 일부분 이었을 뿐일 수도 있겠다'는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강렬한 잔상으로 남는다.

정적인 카메라, 그리고 인물의 프레임안에서의 위치를 봤을 때 마지막 장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안, 중앙에서 꿋꿋이 걸어가는 '이다'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는 이 세상도

결국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 몫이라고 말하는 듯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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