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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정치 Oct 09. 2023

공산주의가 걸어온 길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만들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전에는 왕과 귀족, 성직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였다. 그런데 산업혁명후에 부르주아들이 생겨나는데  이들은 신분은 평민이지만 재산이 많은 자본가계급이었다.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무런 특권을 가지지 못했던 부르주아들은  기존의 신분질서에 불만을 품었고 대중을 동원해 왕과 귀족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한편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외에 새로이 노동자계급도 만들어 졌다. 이들은 부르주에 예속되어 일을 했는데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임금을 삭감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사례가 나타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은  중세의 신분제도를  타도하기 위한 운동이자만 후일 공산주의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마쳤다. 혁명에서 권력을 잡은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는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올리고 무고한 시민을 7만명이나 죽였다. 자코뱅파는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천주교를 탄압했으며 개인의 재산권을 제한하였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1871년 노동자혁명정권인 파리코뮌과 레닌의  공산정권하에서 이루어진 숙청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은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왕과 귀족 뿐 아니라 부르주아와 성직자까지 제거해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론(무신론)과 사유재산부정론을 공산주의의 두 기둥으로 삼았으며 ,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이 자본가에 대하여 투쟁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1847)과 제1인터내셔널 (1864)이란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1848년에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하는 등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레닌, 세계최초의 공산국가를 만들다.

 마르크스가 꿈꾸던 공산정권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러시아의 레닌이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반정부활동을 하다 정부에 쫓겨서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자인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추종하고 있었다.
  1차대전에 참전중이던 러시아에서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1917년 2월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였고 경찰이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면서 여성, 노동자, 군인까지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마침내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고  러시아에는  임시정부가 만들어  졌다. 임시정부에는 부르주아와 지주, 노동자 농민 등 각계의 대표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자 레닌은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러시아로 돌아와  부르주아를 배제한 급진적인 정권을 만들고자  하였다. 레닌은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볼셰비키 세력을 규합하여 10월 혁명으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게 된다.  레닌이 러시아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했던 독일황제가 레닌에게 돈과 무기를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정권을 장악한 레닌은 러시아에서 국유화, 국영화 등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1919년에는 공산주의를 전세계로 확대시키기 위해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을  만들고 ' 약소국 과 식민지국가에서 공산주의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레닌의 공산주의 수출결과로  1921년 에는 중국공산당이 설립되었다. 1922년 레닌은 러시아와 주변 15개 국가를 통합하고 국호를 소련으로  바꾸었따.
 
 2차대전후 공산주의가 확산되다.

 제2차 세계 대전후 소련은 전승국으로 엄청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나치 독일과의 전중에서 2,000~2,700만이라는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는데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소련은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동유럽국가들과  중공, 북한, 북베트남 등 아시아 각지에서 다수의 위성국가를  확보했다.  이후 소련은 1991년에 붕괴되기 전까지  공산주의 진영의 왕초로서 미국과 대립했다.
 2차대전후 소련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운동이 활발하였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두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연대하기도 했으나 일본이 패망하자 양측은 치열하게 충돌하게 된다. 처음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이 우세했으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려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밖에도  국민당은  부패와 물가상승 등으로  민심을 잃었고, 결국 전쟁은  공산당에 유리하게 진행된다.  1949년 12월 10일 장제스는 청두에서 타이완으로 탈출했고,  중국 대륙은 완전히 공산화된다. 중국 공산당은 신장과 티베트 지역까지 병합하면서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다.
 한반도도 공산주의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1945년 소련은 38선을 봉쇄하고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하있다.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한반도는  분단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팽창을 부러워하던 김일성은 적화통일에 대한 욕심이 강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하여 1948년부터  주한미군철수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1950년 1월 5일에는 트루먼대통령이 군대를 사용해 분쟁에 개입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하며 아시아 불개입정책을 선언했고 같은 해  1월 12일에는 한반도와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에치슨선언이 있었다. 김일성은 한반도를 적화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하고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침공하여 대한민국은 멸망직전에까지 갔으나 유엔군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였다.
  중국과 인접해 있는 동남아 지역에서도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호치민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베트남 공산화에 나서게 된다.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를 격퇴했으나 아시아에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의 개입으로 1954년 북위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1955년 11월 부터 자유진영인 남베트남과 공산진영인 북베트남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어 1964년 8월부터는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였다.  1973 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미군이 철수하자 1975년에 북베트남은  대규모공격을 시작하여  적화통일이 완성되었다.  베트남 공산화의 영향으로 1975년에는 라오스에도 공산정권의 수립되었고  캄보디아에서는 폴포트가 이끄는  공산당이 만들어졌다.
 공산국가내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한  공산진영간의 전쟁도 있었다. 베트남이  친소련적 태도를 보이자 중국은 캄보디아의  폴포트를 앞세워 1977년에  베트남과  캄보디아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하여, 크메르 루주(캄보디아 공산당)를 퇴출시키고,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이에 격분한 마오쩌뚱은 국경분쟁을 일으켜  1979년에 중국과  베트남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베트남의 저항이 거세고 소련의 압박이 강해 중국의  전쟁 포기로 끝났지만 그 이후에도 국경에서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되었고 지금까지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

동유럽 공산국가와  소련이 몰락하다.

 1980년대에 들어  소련은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이 나타나고 미국과의  군비경쟁에서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면서 서서히 침체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가스와 석유 등 천연자원을 팔아 버텨왔으나 유가하락으로 가뜩이나 어려웠던 경제가 타격을 입혔다.
 1985년에 정권을 잡은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마주한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제적 개혁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정치적 개혁정책인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발표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성과는 크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 개혁은 시민들이 그동안 억압되었던  정치적 의사를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소련인들은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공산당 일당체제 개혁, 지역자치 보장, 검열 철폐 등을  요구했고 . 공산당내에서는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과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대립하여 소련은  급속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동유럽에도 영향을 미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하나둘씩 민주화 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동유럽국가들은 소련에 의해 마지못해 공산주의를 도입했으나  서유럽의 발전상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민주화의 욕구가 강하였다. 소련도 더이상 동유럽 국가의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동유럽 민주화에 정점을 찍은 사건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사건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소련은 동유럽에서  공산주의를  유지하기를 포기하였다.  
 한편 소련의 위상이 급속하게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한 공산당 내 보수파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조치에  반발했고  고르바초프가 휴가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 그러자  소련인들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고 수도인 모스크바를 비롯해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 주요 도시에서 쿠데타에 반발하는 시위가 빗발쳤다.  보리스 옐친은 생방송 기자회견을 통해 쿠데타에 맹렬히 맞설 것을 주문했다. 소련 연방을 구성하는 주요 공화국 지도자들과 국제 사회는 옐친을 지지하였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소련인들의 반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실상 항복했다..  소련 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1991년 9월에는 연방을 구성하던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 독립하였고   이어서 12월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했다. 소련은 더이상 존속하지 못하고 해체되었으며 고르바쵸프는 사임하고 옐친이 러시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중국이 개혁개방하고 변종공산주의가  탄생하다.

 마오쩌둥시대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파폐해진 중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단행하여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다. 외자 유치를 적극 장려하고  광둥성의 선쩐, 푸젠성의 아모이 등에 경제특구가 설치되고 상하이, 톈진, 광저우, 따롄 등의  도시에 경제기술개발구가 설치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공하게 된 데에는 미국의 도움이 컸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공산권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도와서 소련을 견제하면서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모순을 낳았다. 농촌과 도시, 연안과 내륙간에 경제 격차가 커지고, 관료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졌다. 인플레나 실업도 눈에 띄게 늘었다.  개혁개방이후 처음에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만족하다가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욕구도 커져갔다.
 개혁개방후에 인민들의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 1989년의 6.4 천안문 사건이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위협을 느낀 정부는  발생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999년에는 파룬궁박해사건이 있었다.. 파룬궁은  리홍쯔가 불가 도가 사상을 포함하여  창시한 중국의 기공(氣功), 심신수련법이다. 중국공산당은 파룬궁을  '사교(邪敎)'로 지정하여 금지하였으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박해를 가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국에서 민주화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중국 공산당은 공산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니고 공산주의의 틀내에서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동상이몽을 한 것이다.

소련은 망했지만 미국과 서유럽도 좌경화되었다.

 2차대전이후 미국과 서유럽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좌경화되어 왔다.
영국의 페이비언협회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같은 단체들이 서유럽과 미국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하고 있었고  공산국가에서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체제전복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왔다.
 2차대전 종전직전에  미국정보당국이 해독한 배노너문서에 의하면 미국정부내에서 소련을 위해 간첩활동을 한 공무원이 300여명이 있었다.
 1970년에 미국으로 망명한 소련 KGB 요원 베즈메노프는 서방을 전복하는 소련의 수법을 폭로했다. 그에 의하면 KGB는 인력과 물자중 10-15%만 전통적인 첩보전에 투입하고 대부분은 이데올로기 침투와 체제전복에 사용한다고 하였다.
 체제전복은  4개 단계로 나누어지눈데 가장 중요한 첫번째 단계는 종교와 도덕, 문화를 파괴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주입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15-20년 동안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며 한 세대를  완전히 좌경화사키는 것이다. 주로  사회에 불만을 가진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대상이 되며 한번 공산주의 이념이 주입되면 성인이 되어도 좀처럼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평등 진보와같은  미사여구로 현혹하면서 도덕의 부정과 문화적 퇴폐를 조장한다. 1960년대의 성해방,  마약, 로큰롤은 청소년의 도덕관념을 무너뜨리고  타락한 정신을 가지게 했다.  
  1960년대에 가두에서 투쟁을 하던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사회 각영역에 진출하여  체제내의 장정을 시작한다.  이들이  사회를  파괴시키는 방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종교영역에서는 가짜 성직자들이 날뛰게하여 종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신을 믿지 않도록  한다. 교육에서눈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쓸모없는 무용한 지식을 주입하여 교육의 정상적인 기능을 훼손한다. 사회생활의 영역에서는 페미니즘, 성소수자, 양심적병역기피자, 불법체류자 등의 인권 운운하며  각종 사회단체를 만들어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는다. 언론기관은 진실과 사실을  보도하기 보다는 선동에 쉽게 협조하는 허접한 존재로  만든다. 공권력에 대해서는 경찰 군인을 조롱하고 범죄자를  미화하여 공권력을 불신하게하고  준법의식을 무너뜨린다. 노조는 근로조건이나 임금보다 이념에 따라 행동하도록하고 끝없는 파업과 파괴를 하도록 만든다.
 체제전복의 두번째 단계는 사회내 갈등을 조장하여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와 회사, 교사와 학생 등  개인간, 집단간 끊임없는 싸움이 계속되게 하고  폭력이나 무기도 사용된다. 이 단계에서 언론은 싸움을 부채질하는 역할을 한다.
 세번째 단계는 위기조성단계이다.  사회내 갈등이 깊어지고 장기화되어 정상적인 국가 기능이 붕괴되어 사회가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인체로 비유하면 중병이 걸린 상태와 같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이 이러한 혼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기를 염원하도록 만든다.
  마지막  단계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단계이다. 공산당은 혼란한 사회를 정상화시킨다는 명분으로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으며 이 과정에서 내전이나 침략이 발생할 수 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그동안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위기를 조성해 온 학생, 교수, 종교인, 사회활동가 등은  사회를 정상화시킨다는 명분하에서 제거된다.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체제전복에 성공하면 권력과 재산 등 모든 전리품을 독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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