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순례길과 다시 떠나는 다섯 번째
긴 비행을 끝내고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예약한 숙소에서 공항으로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서로 얼굴을 모르니 찾을 길이 없고 공항이 넓어서 숙소 직원과 만나기로 약속한 주차장의 어느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순례길 떠나기 전에 생존 스페인어를 6개월 동안 공부했지만 막상 스페인에 도착하고 보니 내가 배운 스페인어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으며 공항에 도착한 후 내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본 남편은 다짜고짜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한국어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한국어에 순간 나도 당황하고 상대방도 당황했다.
parking이라는 단어라도 말했어야 하는데 남편은 무작정 주차장, 주차장은 어디로 가야 되나요?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상대방은 스페인어로 한참 얘기하다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자 자리를 피했고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한마디를 했다.
“아니 스페인에 와서 왜 한국어로 물어보는 거야? 영어도 아니고? ”
“그럼 어떻게 해? 영어도 못하고 스페인어도 못하는데 한국어라도 해야지. 하하하 ”
남편은 멋쩍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되는데 남편은 스페인 땅에 내리는 순간 내가 알던 남편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한국어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남편의 대책 없는 한국어는 순례길 걷는 내내 계속 이어졌지만 이 엉뚱한 소통 덕분에 우리는 길을 헤매지 않고 다녔으며 숙소에 도착해서도 큰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지금은 번역 앱이 잘 되어 있어서 굳이 영어나 스페인어를 못해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남편과 처음 순례길을 떠났던 2017년은 스페인의 통신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번역 앱 사용을 자주 할 수 없었다.
남편은 한국어를 열심히 하는 본인을 전혀 창피해하지 않았고 걷는 동안 조금씩 당장 필요한 스페인어 단어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다른 외국 순례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남편은 평소에 말주변도 없고 낯을 많이 가리기도 하고 특히나 음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 회식조차도 앉아 있기 힘들어 밥만 먹고 집으로 오는 사람이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고 늘 가족들의 의견을 우선으로 생각해서 항상 자기 몫은 뒤로 미루는 사람이고 즐겁거나 슬퍼도 자기감정 표현이 많이 서툴러서 가끔 이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 걸까 의문을 들게 한다. 남들 다 하는 취미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지만 그로 인해서 스스로 스트레스받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나는 늘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하고 각종 취미를 섭렵하는 게 일상인 사람인데 남편은 그런 나에게 큰 불만 갖지 않고 가끔 내가 만나는 사람들 모임에 남편을 데리고 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정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불편해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나름 나를 위해서 그래도 그 자리를 꿋꿋하게 앉아 있는다.
처음 낯선 나라로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남편은 많은 부분을 불안해했다. 일단 언어가 자신 없었고 과연 50일 가까이 걸을 수 있는 체력이 될지 걱정했으며 혹시나 도중에 다치거나 아프게 되면 어떻게 할지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에 도착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많은 각국의 순례자들과 만났다 헤어지면서 남편은 그 어느 때보다 잘 웃었고 평소에 거의 하지 않던 요리도 순례길 걷는 내내 나를 위해서 만들어주었다.
걷는 동안 많은 걸 내려놓고 홀가분해하는 남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몸은 힘들었지만 나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순례길은 꼭 필요한 휴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특별히 본인의 성격을 고쳐보려고 애쓴 것도 아니고 대화가 잘되지 않지만 자기가 느끼는 걸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음식을 주문하던지 대중교통을 타든 지 할 때도 한발 물러서는 것 없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남편을 보면서 진짜 이 남자 누구지? 내가 알던 내 남편이 맞는 건가? 하는 기분 좋은 의구심이 들었다.
짧게 교제하고 결혼했었기에 나는 남편에 대해 많은 부분 잘 알지 못했고 또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늘 소극적인 남편이 불만이었고 그저 하루 별 탈 없이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남편의 성향을 답답해했다.
항상 제안을 하는 건 내 몫이고 별말 없이 따라주는 남편이 고맙다가도 살면서 먼저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적 없는 남편의 내성적인 성격이 때로는 나와 맞지 않다고 느껴 힘든 적도 많았다.
우리의 안 맞는 부분도 20여 년 결혼 생활로 인해 무뎌지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면서 어느새 그 불만족이 편안함으로 느껴졌고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든든한 친구 같아서 이제는 더없이 좋은 우리 사이지만 스페인에서 발견한 남편의 새로운 모습을 보면서 50일 걷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변화될지 순례길을 다녀온 이후의 우리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