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30만자를 써 보고 나니
글을 쓰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일기는 일기장에 써라.”
이는 내부의 검열관이 이야기하기도 하고,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말에 포함된 의미는 대략 이런 것일 테다.
‘그리 대수로운 글도 아닌데, 이런 글을 굳이 공개된 곳에 게시할 필요가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아주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일기’의 범위에서 아주 자유로운 글이 몇이나 존재할까.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말은 다른 한편으로 ‘그건 네 생각이고.’라는 말도 포함하고 있다. 글을 이왕 쓸 거면 공신력이 있고, 검증된 것만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글을 써서 게시하려고 할 때마다 한 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자.
“일기는 그냥 일기장에만 간직하자.”
이렇게 하면, 아마 여러분은 앞으로 글이라고는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앞서 이야기하였듯 큰 의미에서 ‘일기’가 아닌 글은 별로 없으며, ‘검증’을 거쳐서 대체로 동의할만한 보편적인 글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사실과 그것을 살아낸 내 삶이 만들어내는 최종 결과물인 ‘진실’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사실’ 그 이면에 각자 인생이 지니고 있는 ‘진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진실이 글쓰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것을 보아도 모든 사람은 다르게 해석한다. 똑같은 생애 주기를 겪어도, 저마다의 인생은 각기 다른 화학작용을 통해 하나도 같지 않은 고유함을 빚어낸다. 글을 쓴다는 건 이 고유함을 창조하는 일이다.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일기는 일기장에’ 같은 말을 할 확률이 높다. 실제 통계 같은 건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럴 확률이 높다. 저마다 비슷한 인생을 살고, 인생이란 대체로 알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글을 쓰기 어렵다. 글이란 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이 써낼 수 있는 인생의 고유함과 닮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나’ 이기 때문에 글을 쓴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글을 쓴다. 글을 씀으로써 나는 점점 나의 고유함을 찾게 되고, 나만의 진실을 짓게 된다.
글을 쓰지 않고 지내면 순간마다 독특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일상’은 어느새 다 같은 얼굴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러면 정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가 된다. 매일매일이 반복되는 것 같고, 고유함은 어느새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다움을 찾는 시대다. 이는 현대 사회가 나다움을 상실했다는 반증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다운 고유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가 자연스러운 나를 찾아 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글을 쓰려고 하면 꼭 검열관이 등장하여 ‘잘 쓴 글’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인생에도 ‘잘 사는 인생’이라는 기준을 만들어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쟁이는 글을 써야 하고, 환쟁이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인생이란 저마다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어져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현대 사회는 인생을 몇 개 숫자로 치환해 놓고 각 숫자를 비교하는 것으로 인생의 기준을 삼아 버렸다. 나이 30에는 연봉이 얼마 이상이 되면 잘 사는 인생, 자산은 얼마 이상 같은 것들이다. 돈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잘 사는 삶’ 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인정하는 ‘잘’사는 삶을 한번 떠올려 보자, 정말 그것들을 내 인생에 다 욱여넣으면 좋은 삶이 될까?
결코 그렇지 않지만 잘 살아야 한다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류’의 압력을 받게 된다. 다들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할 것 같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안 될 것 같다. 적극적으로 시류를 따라 사는 삶도 있지만, 시류를 벗어나고는 싶어도 용기가 없어 쓸려 다니는 인생도 있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 있다. 시류를 따라 살만큼 나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시류를 거슬러 오를 만큼 힘은 아직 없다.
쓸려 다니기도 하고, 쓸려 가면서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나는 강을 거슬러 올라 나만의 물줄기를 만들어 낸다. 글쓰기는 나를 가장 나답게 꺼내는 수단이며, 예술적 재능이라고는 없는 내가 예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이다. 범인을 비범하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존재이며, 나를 최고로 나답게 하는 보물이다.
글쓰기로 내가 짓는 진실은 곧 내 삶이 된다.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좇는 ‘기준’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진실을 창조하는 삶을 살고 싶은가.
‘시류’라고 하는 것이 말하는 기준이 모두 쓸모없다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삶에는 분명 숫자가 필요하며, 생활의 필요는 사는 동안 평생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활’만 남은 인생은 매우 초라하며, 인생 본연의 고유함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내 삶이 남의 삶과 구분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기 전에, 글을 써 보자. 비슷한 인생은 마치 모래에 파묻힌 물건과 같다. 물건의 모양이 어떤 것이든, 모래에 파묻혀서 뭐가 어떻게 다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자신의 모래 속에 파묻힌 것이 어떤 모양인지 점차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고유함을 되찾으면, 나다움 또한 나를 찾아올 것이다.
여태껏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어왔다. ‘그건 네 생각이야’ 하는 말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있지도 않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을 찾아다니며 우물쭈물 나를 전혀 꺼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는 ‘일기장에 쓴 일기’가 5권이 됐다. 이제야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는 내 안에 검열관 녀석에게 한마디 한 셈이다. 일기장에 130만 자 가까이 쓰고 나서야 말이다. 1년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내게 부지런히 글을 써주면서 느꼈다.
‘그간 정말 내가 없는 삶을 살았다.’
‘있지도 않은 세상의 기준을 좇느라 내가 아닌 타인이 되려고 했다.’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땅 속 깊이 묻혀있던 ‘나’라는 보물은 이제 윗부분이 아주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 손에 쥔 펜으로 이 모래를 계속 파내려 가 볼 생각이다. 모두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닿을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다. 내가 가 닿아야 하는 것은 내 인생에 고유하게 주어진 나만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시때때로 시류의 압력에 맞서 싸운다. 펜을 쥔 손으로 끝까지 파내려 가 나의 진실에 닿고, 거기에 다녀온 이야기를 글로 써내려 갈 것이다.
짧다. 제한된 인생,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이다. 글쓰기로 인생의 각 부분을 채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일기는 일기장에’를 반박하려고 글을 쓰긴 했는데, 역시 또 글을 발행하려고 하니 불쑥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말이 나온다.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일기장에 썼어야 할 것을 발행하게 될 것 같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기장’ 한 편 구경했다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