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떠올리며 글쓰기
누군가를 떠올리며 글을 써 보세요.
한 사람을 떠올리며 글을 쓰면, 마치 그 사람과 함께 있는듯한 착각이 듭니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글을 쓰면서 그와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멀리서 친구가 한 명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그를 생각하며 글을 한 편 써보려 합니다.
내게는 6살 어린 친구가 한 명 있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막 스물일곱이 되었을 무렵이다. 스물한 살이었던 그 친구는, 나의 마지막 군대 동기가 되었다. 내가 입대할 당시는 ‘동기제 생활관’이었기 때문에, 한 생활관이 가득 찰 때까지 들어오는 모든 신병이 다 동기였다. 한 생활관에는 열두 명이 편성되었다. 신병이 2주 간격으로 들어온다고 하면, 첫 번째 들어온 친구와 마지막 들어온 친구는 6개월 남짓 차이가 나는 셈이다.
나는 입대 자체도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늦은 편이었고, 그마저도 연말에 입대했다. 생활관에는 이미 4,5개월 먼저 입대한 동기들이 있었고, 내 뒤로는 한 두 자리만 남아 있었다. 생활관의 두 자리를 비워둔 채,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혹한기 훈련이라고 추운 산에서 며칠을 지냈다. 동상 직전까지 손은 부르트고, 잔뜩 긴장한 데다 날은 추워서 유난히 더 얼어붙어서 훈련을 마무리했다.
그 고생을 하고 돌아와 보니 신병이 왔다. 우리 생활관의 마지막 멤버가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생활관마다 다음에 들어오는 동기를 챙겨주는 문화가 있었는데, 그때가 마침내 순번이었다. 2주쯤 먼저 온 내가 지금 막 들어온 동기의 짐을 풀고 PX(군용 매점)에 데려가 샤워 도구나 칫솔, 그리고 간식을 몇 가지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보통의 훈련병들은 처음 자대 배치를 받아 오면 엄청 긴장한 상태인데, 이 친구는 어딘가 어리버리한 구석이 있었다. 양말이며 전투복 같은 것을 각을 맞춰서 정리해 두는 게 일반적인데, 이 친구는 관물대에 온갖 옷이며 양말 같은 것을 다 쑤셔 넣어 두었다. 충격을 받고는 다 꺼내서 새로 정리해 준 기억이 난다. 그게 나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짐을 풀어 준 사이이기도 했고, 전역일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동기임에도 내가 6살이나 형이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형 행세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군대라는 특성이 반영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가 치는 장난의 수위는 금방 높아졌다. 눈을 감고 샤워를 하는 도중에 머리에 계속 샴푸를 붓는다든지, 샤워장에 놓인 옷을 숨긴다든지 하는 장난을 많이 쳤다. 물 온도를 갑자기 낮추거나, 엄청 뜨거운 방향으로 돌려놓기도 했다.
장난을 매번 치면서도 나는 좀처럼 당한 적이 없었는데, 하루는 이 친구가 내게 같은 장난을 쳤다. 장난을 똑같이 쳤으면 당하는 것도 괜찮아야 하는데, 나는 더 심한 장난으로 갚으려 했다. 정도는 더 거세져서 감정이 상하는 데에 이르렀고, 급기야 그 친구와 따로 이야기를 하는 상황까지 만들어졌다.
“형은 괜찮고 나는 안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늘 나는 장난을 치는 입장이었는데, 당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장난이라고 상대방을 놀리고 골렸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한차례 당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 알았다. 장난을 칠 때는 당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내가 당해도 똑같이 웃어넘길 자신이 없으면, 그 장난은 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미안해.”
그때부터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난 부분, 나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은 안된다는 식의 ‘내로남불’ 사고방식을 조금씩 깎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어서 나조차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옹졸함과 얄팍한 우월감 같은 것들이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좀 더 낫다.’는 사고방식, ‘나는 상대방보다 더 복잡하고 입체적인 사람이라는 생각’ 같은 것들을 하나씩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때부터 인격이나 품성이 다듬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친구를 떠올리면 군 입대 초기의 이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내게는 큰 깨달음을 주는 분기점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 얻은 교훈을 간직하고 살고자 한다. 여전히 모난 부분이 많아서 ‘나는 되지만 다른 사람은 안돼.’ 식의 생각을 할 때도 많지만, 그때 일을 떠올리며 겸허해지곤 한다.
그 이후로 이 친구와 나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나이도 잊고 같이 땀 흘리며 한 때를 보냈다. 이 친구와 함께 기억나는 몇 장면을 떠올려 본다.
키는 190에서 몇 센티미터 빠지는 키였지만 몸무게는 평균보다 한참 아래였고, 유재석과 같은 앞니 돌출형 구강구조를 가진 탓에 별명은 ‘앞니’였다. 마치 신장개업한 고깃집 앞에 펄럭이는 인형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 저녁 점호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어디선가 생라면을 가져와서 불 꺼진 생활관 중앙 테이블에서 오도독오도독 라면을 씹었다. 시끄럽다며 누군가 핀잔을 주면, 자기는 코를 골아서 늦게 자야 하니 기다리는 김에 라면을 먹는다는 둥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친구였다.
상급부대에서 평가를 하는 기간에 긴장을 너무 한 탓인지, 급했던 탓인지 탱크에서 뛰어내려 발가락이 골절돼서 온 부대의 질타를 받는 친구였다.
주말이면 컨테이너 안에 조악하게 만들어진 노래방 기계를 점령했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 친구의 노랫소리는 영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 친구가 좋아했던 노래 장르는 힙합. 비와이의 ‘얍, 얍, 얍’이 머릿속에 맴돈다.
군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에는 후임들과 매일 티격태격하는 친구였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소위 ‘먹혔다’고 한다. 동기들은 툭하면 후임들에게 볼멘소리를 들으며 지내는 이 친구가 어쩐지 재미있었다.
누가 순찰을 온다고 해도 ‘안 걸리면 된다’는 정신으로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관물대에 부식으로 나오는 음식을 넣어놓는 건 기본이고 빨래통에 담아둔 세탁물을 일주일 내내 방치하기도 했다. 불침번을 서야 해서 깨워도 좀처럼 제때 일어나지 않는 건 기본이고, 남들 다 자는데 우당탕탕 시끄럽게 해서 단잠을 깨우는 친구였다.
하는 짓은 엉뚱하고 툭하면 원성을 듣는 친구였지만 어딘가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엄숙한 분위기도 금세 유쾌하게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을 가졌고, 솔직한 감정표현은 군부대 내의 분위기를 더욱 격의 없는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시간이 흘러 스물일곱 살이었던 나는 서른네 살이 되었고, 스물한 살이었던 그 친구는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오늘 친구가 멀리서 나를 찾아왔다. 지인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왔는데, 나를 꼭 보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운전도 서툰 친구가 왕복 90km를 운전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임박한 대학원 과제 제출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쫓기느라 여유를 내지 못했는데, 이 친구는 여행 중에 시간을 쪼개 나에게 내어 주었다. 한 시간을 달려온 친구와 함께 차 한잔을 손에 들고 해변을 걸었다. 결혼 이야기, 사는 이야기, 일 이야기, 짧은 시간이지만 몇 마디 주고받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을 위해 왕복 두 시간을 운전해 와 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떠나며 임신 축하선물이라며 상품권 한 장을 건넸다. 또 제대로 한 방 먹었다. 분주함에 허둥대느라 친구를 만나는 시간조차 쫓기듯 나섰는데, 멀리서 찾아와 준 것도 모자라 상품권까지 건네는 모습에 군 입대 초기에 그와 다투며 깨달았던 교훈이 생각이 났다. 또 하나 배운다. 그 마음을 배운다.
잠시 숨을 돌리고 글을 쓴다. 멀리 나를 찾는 이가 있어 고맙고, 삶의 한 편을 내어주는 이가 있어 고맙다. 그를 떠올리며 글을 한 편 지어 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잔잔한 기쁨이 있는 날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_에반
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고 싶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무언가가 되었다. 남은 그의 여행이 더 아름답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