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목적은 글쓰기 자체이다. 언제나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지, 글이 수단으로써 어떤 역할을 하는가는 그다음의 문제이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써야 할지 기술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무엇을 써야 할지 조차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글이 수단이라면, 어떤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 나의 상태는 글을 쓰기에 부적절한 상태이다. 사상이나 생각, 주장 등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무엇’을 쓸지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고종석의 장편소설, <독고준>이 놓여 있고, 한 켠에는 한범수의 시집이 놓여 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서재의 책상 뒤편으로는 자리가 없어 꽂히지 못한 책들이 바닥에 겹겹이 쌓여 있다. 책장을 정리할까, 아니면 아까 읽다 만 소설을 다시 읽을까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자꾸 울리는 핸드폰 알림이 성가셔서 핸드폰을 모질게 꺼버렸다. 엉덩이에 돌을 깔고 앉은 듯 앉은자리가 불편하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낼까도 생각해 보지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그렇게 쓰는 글은 ‘무엇’에 해당하는 내용도 없고, ‘어떻게’에 해당하는 기술도 당연히 없는 글이다. 지금 이 시간에는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이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명확한 내용을 글자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로 이 시간을 지낼 수 있어서 좋다. 그게 아니면 내용도 기술도 없는 이런 글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냥 써내려 가기만 한다. 글 쓰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식과 조금 다르게 생각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행위에는 ‘왜’에 해당하는 것이 먼저 설정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코칭을 받아 보아도 ‘Why’에서 출발하라고 하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네가 그 일을 왜 하고 싶은지 생각해 봐’라는 말로 표현되는 ‘왜’에 대한 물음은 일견 타당성을 갖는 듯 보인다.
글을 쓰는 인생을 살기 시작하고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글을 쓰는 데 이유 같은 게 없다. 왜 쓰는지 알고, 글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글을 쓴다는 건 불가능하다. 차라리 글을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글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왜’ 같은 건 묻지 않는다.
‘이유가 어딨어, 그냥 쓰는 거지.’
나는 모른다. 왜 내가 눈을 뜨자마자 펜을 잡고 의식의 밑바닥을 긁어내려 하는지. 또 나는 모른다. 내용도 기술도 없는데 무엇을 쓰고자 이렇게나 많은 글을 찍어내고 있는지. 내게는 그런 것들을 알아낼 재주가 없다.
릴케가 말했듯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한 말이나, 김형수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글을 쓰는 동력은 ‘사랑’이라고 한 말을 떠올려 본다.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말의 의미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쓸 수밖에 없다.’이다. 다시 말해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안 쓰고는 안 되겠어서 쓴다는 말을, 릴케 정도 되니까 저 정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김형수 작가가 이야기한 ‘사랑’도 비슷한 맥락이다. 무언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한다. 실제로 생명이 탄생하는 것뿐 아니라, 글 한 편을 탄생시키는데도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 말도 푹 빠져 있어야 쓸 수 있다는 말이며, 이유 같은 거 잘 모른다는 뭐 그런 의미이다. 언뜻 생각해 봐도 사랑에 ‘왜’는 없고, 수단으로써의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나도 두 분 작가의 표현을 빌어 이야기한다. 나도 이유 같은 거 없고, 그냥 쓴다고 말이다.
나는 쓰는 게 인생과도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왜 세상에 태어나는지 갓난아이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갓난아이뿐만이 아니다. 당신 왜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의심 없이 나의 존재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설령 말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이유가 진정 자신의 존재 이유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삶이 어떻게 와 있고,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 못하나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글을 왜 쓰는지, 무엇을 이루기 위함인지 알 수 없으나 쓰고 있다.
글은 어느새 나의 존재 양식이 되었다. 나의 인생이 살아가는 방식이 글이라면, 지금 같은 행위는 자연스럽다. 삶을 산다는 말이 곧 글을 쓴다는 뜻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런 내가 훗날 참 좋아질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수수께끼 가득한 삶과 내 글쓰기의 여정에서도 그 이유를 조금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살고 있으며, 쓰고 있다. 나의 글쓰기는 곧 나의 삶과 맞닿아 있다.
쓰고 보니 글쓰기를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라도 한 푼 생기는 것도 아니고,
글쓰기를 수단으로 뭘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글을 쓰느라 책 정리도 못 하고,
핸드폰까지 꺼버렸다.
글을 쓰고 있으면 막 즐겁고,
내가 만들어내는 활자가 나를 막 안아주는 것 같고,
쓰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포근해질 수가 없다.
이런 별 쓸모없어 보이는 글쓰기의 결론이 났다.
‘아, 나 사랑에 빠진 거구나.’
꽤 기분이 좋다. 나 글 사랑하는 거 맞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