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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ffe Feb 15. 2024

고통이 가득한 삶 속에,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파벨만스(Fabelmans), (2022)

지평선을 옮기고, 카메라 앵글을 돌리고, 시선을 뒤바꿈으로 삶의 비극을 통제하고 손 안에 담아내기까지.


<파벨만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자전적인 영화이다. 어린 스티븐 스필버그가 투영된 주인공 "새미 파벨만"을 통해, 자신이 성장해오는 과정에서 느꼈던 아픔들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종합 예술인 영화가 그 시절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상의 캐릭터인 새미 파벨만(Sammy Fabelman)을 내세우고 있지만, 할리우드의 이야기꾼(Fable Man)으로 오랜 시간 활동해온 스필버그의 깊은 속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그려내고 있어서, 스필버그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돌하는 걸 봐야 했던 거구나. 
자기만의 세상을 통제해보려는 거야.

That's why he need to watch them crash.
He's trying to get some kind of... control over it.


 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영화 <지상 최대의 쇼>를 처음 본 새미는 유대교 명절인 하누카 선물로 기차를 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단순히 기차 장난감을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새미가 원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는, 영화관에서 봤던 충격적인 기차 충돌 장면을 재현하는 것. 밤늦게 몰래 혼자서 기차 장난감이 벽에 부딪히는 것을 관찰하던 새미는 부모님에게 혼이 나지만, "충돌하는 것을 봐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 속내를 깨달은 예술가 어머니 미치의 도움으로, 새미는 자신만의 첫 영화를 찍는다.


새미의 손 안에 잡힌 기차 탈선 장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충격적인 장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 담아내면서, 그 충격적인 장면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장면이 되었다. 두려움을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말 그대로 손 안에 쥐게 된 새미. 영화의 관심은 삶 속의 두려움과 비극을 어떻게 손 안에 통제하느냐에 있다.



새미는 자라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함과 동시에,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을 두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 


먼저 발견한 비극은 어머니의 배신. 아버지의 부탁으로 가족의 캠핑을 정리하는 영화를 편집하다, 아버지의 친구 베니와 어머니 사이의 선을 넘은 관계를 발견하게 된 새미. 어머니에게만 조용히 이 사실을 모은 영상을 보여주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지만, 결국에는 가정은 어머니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파국에 치닫는다.


새미를 찾아온 또다른 비극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새로이 옮긴 터전의 학교에서 새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로건의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코뼈가 부러지기도 한다. 현실은 매일매일 찾아와 그의 삶을 고통으로 이끈다.


실제 스티븐 스필버그의 경험을 담아내고 있는 이 아픈 이야기. 스필버그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심지어는 자서전에도 담지 않았고 자신의 동생들 마저 몰랐던 자신의 깊숙한 상처를 드러내면서 관객들에게 역설적으로 영화라는 예술의 가치를 말하려 한다.


새미는 두 가지 비극을 모두 렌즈에 담아서 자신에게 비극을 가져다준 대상에게 보여준다. 어머니의 아름다운 춤이 담긴 캠핑 기념 영화를 어머니에게, 그리고 로건을 영웅처럼 만든 "땡땡이의 날" 기념 영화를 로건에게.


두 영화는 얼핏 비슷해 보인다. 자신에게 비극을 가져다 준 두 대상이 자신에게 준 상처는 숨기고, 상대를 아름답거나 위대하게 묘사한 것. 그러나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다.



자신이 무엇을 찍고 있는지도 전혀 모른 채 가족이 캠핑하는 모습을 찍어두고, 편집과정에서 베니와 손을 잡은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새미. 새미는 화들짝 놀라며 한참을 고민하다, 어머니의 탈선이 담긴 부분을 걷어내고 어머니의 아름다운 춤이 담긴 모습만을 남긴 영화를 가족 앞에서 보여준다. 어머니 미치는 그런 새미에게 "날 꿰뚫어 보는구나"라고 말하며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미가 의도했던 방향과는 전혀 달랐다. 새미는 가족들이 충격을 받을 것을 걱정해 외도 사실을 숨기기로 결정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남몰래 걷어낸 부분을 모은 영상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고 베니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는데에 동의하지만, 베니에 대한 그리움에 우울증이 온 나머지 기행을 벌이고 결국엔 가족을 떠난다. 새미 역시 이 일에 큰 상처를 입어 영화 만들기를 그만둔다.


이미 한 번 아픈 경험을 겪은 새미가 만든 다음 영화, "땡땡이의 날" 기념 영화는 그렇기에 이전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자신이 무엇을 찍고 싶은지,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환경을 통제하여 자신이 그려내고 싶었던대로 영화를 찍어냈다. 자신을 괴롭히던 로건을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멋있고 위대하게.


로건은 그런 새미에게 찾아와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왜 자신을 그렇게 영웅처럼 묘사했냐고 되묻고, 영상에 드러난 남자를 자신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며, 실패자나 사기꾼이 된 기분이라며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와는 반대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영화계에 입문한 새미는 어린 시절 동경하던 전설적인 영화감독 존 포드를 만나게 된다. 존 포드는 새미에게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며,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묘사해보라고 한다. 그림에 어떤 대상이 보이는지 열심히 설명하는 새미의 말을 끊고, 존 포드는 지평선의 위치가 어디있냐고 되묻는다.

이걸 명심해. 지평선이 바닥에 있으면 흥미롭고,
지평선이 꼭대기에 있으면 흥미롭고, 
지평선이 가운데 있으면 더럽게 재미없어! 

Now remember this. When the horizon is at the bottom, it's interesting.
 When the horizon is at the top, it's interesting.
When the horizon is in the middle, it's boring as shit!


지평선의 위치는 어디인가. 어떤 각도로 찍고 있는가. 즉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가 무엇을 찍는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존 포드의 말. 영화는 삶의 비극을 통제하려했던 오프닝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말하는 엔딩에 다다른다.

존 포드의 사무실에서 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새미. 카메라는 위트 있게 지평선의 위치를 옮긴다.




나는 음악과 영화를 참 좋아한다. 어떤 때는 오랜 기간 동안, 어떤 작품에 꽂혀서 몰입한 채로 살아갈 때도 있다. 예술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강렬한 느낌과 환상적인 상상력의 세계에 매료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 밖을 나설 때, 음악이 울리는 이어폰을 벗고 삶으로 들어갈 때, 다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마치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인천공항에서 습한 한국의 공기를 체감하듯이,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삶의 실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어떤 운동선수의 말처럼 "리얼 월드"로 돌아오면, 예술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세계는 꿈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꾸며낸 이야기일 뿐인 예술은 당장 오늘을 살아야하는 나의 실존에, 고통과 비극으로 얼룩진 현실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오늘의 삶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슨 소용인가, 물어보게 된다.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삶의 깊은 두 가지 비극을, 자신의 동생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깊은 비밀까지 꺼내어, 영화에 담아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삶 속의 충돌하는 장면을 바라보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예술을 하는 이유는 지평선의 위치를 옮기고, 카메라의 앵글을 돌리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영화의 엔딩에서, 주인공 새미를, 스티븐 스필버그를 괴롭히던 비극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가족을 떠났고, 그의 핏줄을 향한 차별은 평생동안 싸워야 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위트 있는 엔딩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영화를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카메라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리가 우리 삶의 지평선을 옮김으로 비극이 가득한 우리의 오늘을 새로이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고통으로 얼룩진 오늘을 우리의 손 안에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뱀발로,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스필버그의 이전 작품들을 다시 보았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은 왜 그렇게 외롭게 부모를 그리워 했는지, <에이 아이>의 주인공은 왜 그렇게 엄마의 사랑을 찾았는지(아직... 에이아이는 제대로 본 적 없지만...). 어쩌면 그의 영화는 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의 이름 "새미"는 스필버그의 어릴적 애칭이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라서 당연히 각색은 있었겠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들은 스필버그가 실제로 경험했던 이야기라고 한다. 특히 필름을 편집하다가 어머니의 불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담은 영화를 옷장에서 어머니에게 틀어주었던 일은, 스필버그의 동생들도 파벨만스의 각본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된, 스필버그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실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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