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셋째를 임신한 아내
(남편이 퇴사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글을 함께 읽은 남편이 볼멘소리를 한다. 글을 읽은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도 백수남편인 줄 알겠다며 빨리 다음 이야기를 쓰란다. 그의 말에 웃으며 실제로는 그렇게 해주지 못하지만 온라인상에서나마 팔자 좋은 남편이 되어보라며 농담을 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핫. 여하튼 남편의 말대로 퇴사 이후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남편은 퇴사 후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결정했고 우리는 2년만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안되면 아무리 작은 회사여도 갈 수 있는 곳을 찾아 재취업하자고 함께 이야기를 마쳤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적어도 2년, 길게는 3년, 최대 4년은 걸릴 것이라 예측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마음먹고 시험을 준비하는 당사자보다는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둘을 가진 가장의 마음은 누가 채근하지 않아도 이미 조급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퇴사 후 처음 한 달 정도는 휴식을 충분히 취하길 바랐다. 평소 성격이 급한 남편이지만 그때는 스스로도 회사 생활을 마치고 이 정도는 쉬어도 되겠다 싶었는지 일주일 정도는 그 시간을 즐기는 듯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유로움을 참지 못했다. 강의를 찾아보고 시험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며 점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공부는 시작되었다.
사실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을 때 공시생이 된 남편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 따위는 없었다. 만약 내가 남편의 뒷바라지에 과하게 진심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 나와 남편의 관계가 평화롭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대신 앞으로 우리의 인생 중에서 이렇게 일을 떠나 있을 시간이 얼마나 있겠냐며 분명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그 기간 동안 남편과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전에는 저녁시간이면 퇴근 후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그와 살림과 육아로 정신없었던 나였다. 하루종일 대화는커녕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물론 절대 공부가 쉬운 일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사회생활의 치열함을 잠시 내려놓은 남편은 이전보다 자신의 속내를 잘 이야기하기도 했고, 꼭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괜찮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의 시간이 자유로워진 덕에 연년생 두 아이의 육아로 정신없는 사이에서도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만들 수도 있었다.
또 나는 너무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 같은 것을 했다. 두 아이의 육아와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가 남편의 퇴사와 공무원 시험 도전에 동의한 것만으로도 충분이 이타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신혼 때 나는 출산과 육아, 그리고 수험생 남편 뒷바라지는 못하겠다고 말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 그것을 다 하게 되었다. 뭘 더 희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런 나의 상황 따위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남편이 공부를 한 지 1년쯤 뒤에 계획에 없던 셋째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역시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하튼 남편의 공부가 시작될 때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그가 직장에 다니는 대신 도서관 또는 스터디카페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내 아들이 아니라 남편 아닌가. 우리는 둘 다 성인이고 각자의 일을 해나가는 동등한 입장이었다. 다른 남편들이 퇴근 후 최소한의 가정일을 돌보듯이 그도 혼자가 아닌 가정을 가진 사람이기에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지만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에게 부탁하고 나도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마음만큼은..) 만약 그때 그를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 이전에 공시생으로서만 대했더라면, 그래서 모든 것을 내가 다 떠맡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더라면 나는 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복직 후에는 남편이 아이들 등원을 맡았고 대부분의 하원은 내가 맡았지만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거나 업무가 많아서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남편에게 부탁했다. 사람들은 그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내가 뒷바라지를 했다 하겠지만 사실 나의 직장생활에 차질이 없도록 그도 열심히 나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해야 맞다.
남편이 1년 조금 더 넘게 공부를 하고 처음 시험에 응시한 해에는 아깝게 1문제 차이로 시험에 낙방했다. 그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한 것은 아닌 마음, 그에게는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사실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쉽게 될 일이면 다른 사람들은 왜 그리 오래 걸리겠는가. 그도 그들 중 하나라고 인정하면 그리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족들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쓰린 마음은 달래지도 못하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덤덤히 다음에는 꼭 될 것이니 걱정 말라며 위로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정했던 2년이라는 기한 때문이었다. (물론 셋째 임신으로 그의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내내 이번에 꼭 합격할 수 있다며 남편을 북돋았지만 시험 전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을 즈음 내 속내를 이야기했다. 원래부터 더 기다릴 생각이었으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라고 말이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었다.
그때 다시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 하나 있다. 두 번째 시험을 위해 다시 힘을 내서 공부를 하자고 다짐한 그에게 내가 출근하지 않는 겨울방학 동안 노량진에서 지낼 것을 제안했다. (이때는 아직 임신 전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때 내 지인들은 나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하지만 그때까지 직강을 듣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을 오다니면서도 ‘어쩔 수 없지. 이렇게 해도 다른 사람들이랑 별 차이 안나.’라며 괜찮은 척하던 그 역시 그 험난한 시간과 부담감을 버티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해 봤던 나이기에 수험생에게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이 둘을 육아하며 직장생활을 해야 했기에 남편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공부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두 달만큼은 그를 위해 시간을 벌어주기로 했다. 주말에도 오지 말라고 말하는 나에게 괜찮겠냐며 재차 묻기는 했지만 남편에게는 내심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제안이 지금 나에게는 그때 공시생 남편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줬지 않냐며 생색낼 좋은 구실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니 정말 잘한 일이 아닌가. 하하
다행히 남편은 두 번째 해에 좋은 결과를 거두었고 최종 합격 발표를 받은 다음 달 나는 셋째를 출산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누구라도 그때 그 상황에 놓였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그때 내가 엄청나게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낸 우리만의 성공담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담은 무수한 이야기 중 하나인 것을 안다. 그래도 나중에 우리끼리 얘기할 거리 하나는 건진 셈이다.
우리는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지내고 그 시간을 열심히 살아갔을 뿐이다. 지금도 우리가 그러하듯이, 또 다른 이들도 항상 그러하듯이 말이다. 다만 조금 달랐던 것이 있었다면 그때의 우리였다. 별 이유 없이 항상 아내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던 그, 그리고 그런 남편이 조금은 짠해서 기죽지 말라고 더 많은 응원의 말들을 건네었던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