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야~!!! 다음에 아빠, 엄마 또 민규 보러 올게~!! 감기 걸리지 말고 잘 있어!!!"
"우우우우~~ 우우~~"
"선생님, 민규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와아아아아~~ 우우우~~"
"네, 아버님, 어머님 걱정 마세요... 민규 씨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잘하고 있어요"
"아아아아~!! 우우우우~"
산속의 겨울은 도시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우두움이 찾아온다.
어느덧 칠십 대에 들어선 노부부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는 어둑해지는 산길을 벗어나려 하지만 마음은 좀처럼 그곳을 떠나오지 못하고 있다.
"당신 아까 민규 흰머리 난 거 봤어? 당신보다 이제는 흰머리가 더 많은 것 같어..."
"민규도 이제 나이가 오십이 다 돼 가니까 그렇겠지... 이 녀석이 우리하고 떨어져서 여기서 산 지도 이제 삼십 년이 넘었네... 우리도 그동안 많이 늙었고...."
"우리가 민규보다 오래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장애아 키우는 어떤 부모도 자식보다 딱 하루만 더 오래 살면 좋겠다고 했다던데 나도 딱 그 심정이라니까..."
"나라고 안 그렇겠어? 말도 못허고, 듣도 못허고, 보이지도 않고 기저귀까지 차고 있는 저 눔을 놓고 어떻게 우리가 눈을 감겠어? 그런데 밖에서는 탈시설화 하자고 장애인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날마다 저 난리니 이제 어쩌면 좋겄어?"
"늙은 우리 부모들끼리라도 힘을 모아서 데모를 하던지 어쩌던지 해야지 안 그래요?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집 장애인들이 나는 부러워 죽겠어요. 여기 있는 자식들하고 비교도 안되니께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딱 하루만 데리고 있어 봤으면 좋겄어.. 자립이 가능한가... 부모가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사람구실 못하는 저 불쌍한 것들을 왜 다 못 내보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니께..."
1991년 1월 28일'라파엘의 집' 원장으로 부임해 온 정지훈 원장은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이곳 풍경에 입이 떡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어설피 보이는 그가 보기에도 형편 없는 이 곳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봐야 하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길도 나지 않아 산짐승이나 다닐 만한 이 산속에 회색빛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으니 유령이라도 나오려나....
기괴하리만치 부조화스러운 이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기본생활에 필요한 비품도 생필품도 없는 이곳에서 과연 내 처음 결심 그대로 시각중복장애인들을 위해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친다.
그러나 어쩔 수 있겠는가.. 그도 열두 살 나이에 사고를 겪으며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 1급으로 지나왔던 삶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피눈물 나는 세월이었던가..
그러나 이들은 시력도, 청력도 없는 자, 또는 시력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자라서 교육은 그만두고 제대로된 보살핌 조차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 한다면 이곳에서 적당히 월급이나 받으며 원장이라는 감투를 누리기엔 양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험난한 사명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장님'이라 '병신'이라 손가락질받던 악몽 같던 삶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공부에 매진했고, 드디어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특수학교에 임용되기만을 기다리던 그였다.
한편 1987년이던 그 당시 가톨릭맹인선교회에서는 시각장애인 몇몇이 모여 또 다른 꿈을 키우고 있었다.
우리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는 시각중복장애인을 위해 도움이 되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등포구 도림동의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작은집 한 채를 개조하여 '라파엘의 집'이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중 한 사람이 10여 명 남짓인 시각중복장애인에게 교육을 해 줄 수 없겠느냐는 도움을 청해 왔고, 거의 무보수에 가깝기는 해도 차비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에 선뜻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교육이고 뭐고를 생각할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목욕을 시키고 빨래를 주무르며 그들의 신변을 돕는 데만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장애인 특수교육에 비전을 두고 있던 그가 그렇게 교육에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각을 비롯한 다른 장애들이 하나 이상씩은 더 있는 중복장애인들이었지만 그나마 교육이 가능할 듯한 두 명에게 먼저 점자교육과 간단한 운동과 산책을 시켜봄으로써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했다. 그러자한 명은 한글점자를 익혀 필담과 필화로 어느 정도의 대화가 가능한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가 찾아와 이런 환경에 둘 수 없다며 집으로 데려가버렸고 나머지한 명 조차 갑작스레 공부 하는 것이 너무 힘에 부쳤던지집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손으로나마 할 수 있는 교육이라도 시켜보자며 등바구니나 등가구 등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아크릴판을 사포로 갈아 모텍스 테이프를 붙여 점자를 찍으며 점자 교육도 해 보았다.
그러한 각고의 노력 때문인지 아무런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그들에게도 점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고 1990년 종로구소재에 터를 옮겨시각중복장애인을 위한 더욱체계적인 교육을하고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그에 필요한 기금마련을 위해 바자회를 열고, 후원회와 봉사자들을 직접 모집하는 열의를 보이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1990년 8월, 꿈에도 그리던 특수교사 임용 결정 통보를 받게 된다. 인천맹학교에서 특수교사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련도 없이 떠나려 했었다.
이제 드디어 '장님, 봉사, 병신'의 삶에서 벗어나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안정된 보수와 직장이 보장된 그곳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며 꿈에 부풀어 있던 그였었다.
그러나....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그들을 놓고 떠나려니 누가 뒤통수라도 계속 잡아당기는 듯이상하다.
잠자리에 들려해도 길을 걸어도 머릿 속에선 끝없는 물음표가 시종일관 따라붙는다.
'나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까...'
급기야 꿈에도 그리던 특수교육 교사의 꿈을 포기한채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다른 이들에게 가차 없이 버려진 그들을 위해 일하자고 마음먹는다.
시각장애인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장애인 교육에 대한 공통분모를 찾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 시킬 수 있는 일에 자신의 삶을 던져보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러던 중 1990년 10월 지금의 여주 '라파엘의 집' 원장으로 와달라는 권유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이곳에서 내가 말하던 교육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면 첩첩산중일 뿐 시설도, 자재도, 심지어 사람이 밟고 다닐 인도마저도 제대로 없는 이곳에서 그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언제나 그의 삶이 그래왔듯 낙담하며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급한 대로 최소한의 시설을 마련한 후 그 해 3월 입소자들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1991년 9월 일본에서 열린 WBU(세계맹인연맹) 총회의 시각중복장애아교육분과에 참여하게 되며 교육, 복지, 재활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립에 이를 수 있도록 이들을 위한 체계적이고도 전문적인 종합복지센터를 건립하고자 하는 비전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사회복지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바쁜 와중에도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노력의 결과인지 다행히도 성과가 늘어나며 본관건물을 증축 하는 데 까지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증축 기간 동안 입소자들이 머물 공간이 없어 도움을 청하던중 여주 도전리에 있는 성바오로딸 수도회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시각중복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이 없던 그곳에 새로운 시설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다.
개축과 증축을 동시에 진행하려니 비용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떻게든 비용을절감해야 했던 그는 군인과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시설을 만들었고, 약간의 시력을 가진 그와 시각장애와 지적장애를 함께 갖고 있는 거주인 중 한 명이 그를 도왔다.
함께 벽돌을 메고 4층까지 오르내리고 일일이 손으로 더듬어가며 돌을 쌓고, 곡괭이로 땅을 파다 머리가 찍히는 등의 위험천만한 일을 겪기도 했다.
그러니 서울에 있는 그리운 가족을 만나러 갈 처지도 못된다. 되는대로 공사현장의 콘크리트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잠을 청하는 수 밖에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된만큼 성과도 많았다.
1994년 12월 특수교육 의무교육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을 기점으로 국내에서 처음기관 내에 특수학급 2학급을 인가받아 13개 학급으로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늘어난 학생 수만큼 힘들게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직원숙소 건물을 증축하고, 직업재활센터를 개원하므로써 직업훈련과 작업활동이 모두 이루어지는 종합복지센터 건립이라는 목표에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지속적인 음악 자극을 통해 그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미세한 가능성이라도 끌어내고자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사물놀이팀과 라파엘밴드팀을 비롯한 라파엘문화예술센터를 창단하여 작은 발표회 시간을 갖기도 한다.
또한 교육용 장비, 촉각자료, 확대자료, 보조공학기기 등을 꾸준히 마련하며 시각청각장애재활센터를 개소하는 등
보육뿐 아니라 교육, 치료, 직업, 재활, 여가생활, 자립에 이르기까지의 서비스를 제공한 결과160명의 시각중복장애인과 100여 명의 직원이 상주하게 되었다.
또한 연간 1만 5천 명 이상의 봉사자와 방문자의 도움으로 물심양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센터가 되었다.
그것뿐인가...
입소자들의 생일은 물론 회갑, 임종, 장례까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꿈을 실현시키는종합복지센터의기틀이마련되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된정지훈 원장은 2012년 국민훈장 모란장(제2337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같은해대구대 일반대학원 특수교육과 시각장애아교육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끝없는 자기계발과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모든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안타깝게도 '라파엘의집'은 거주인 학대 기사가 연일 올라오며 '장애인 탈시설화'를 외치는 그들의 편에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160명이 거주하는 초대형 거주시설인 '라파엘의 집'을 폐쇄조치해야 한다며 강도 높게 외친다.
그러나 이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부풀려져 있으며 또는 미묘한 정치적 관계와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학부모들은 그런 소식이 들릴 때마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기 힘든시각청각발달중복장애인이 대부분이다.
물론 여기서퇴소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고 희망하는 열다섯분 모두 퇴소처리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정도의 자립생활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라파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정지훈 원장의 지난 과거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데는 만약 시설이 폐쇄 되었을 때 이만큼의 열정으로 그들 각 개인에 맞는 욕구를 해결 해 줄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있을까를 우려해서다.
무조건적인 탈시설만이 절대 해답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지난 2017년 강서구 소재 특수학교 건립을 결사 반대하던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가?
가까운 특수학교가 없어 일반학교에 진학해 말할 수 없도록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발달장애인을 위해 특수학교를 짓겠다고하니 이웃들은 성난 들소처럼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장애아 부모들은 제발 도와달라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나는 잊히지 않는다.
이들이 살인을 저질렀는가? 남의 것을 강탈했던가?
특수학교가 기피시설이나 혐오시설은 아니라면서도 내 집 앞은 안되니 대체부지를 마련하라는 이중잣대가죄없는 이들을 무릎 꿇게 만들지않았나....
그래서 산속에 있지 않은가? 누가 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모를 산을 깎아 들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탈시설화 하여 그룹홈을 만든다면 그건 누가 찬성할까?그에 따른 천문학적인 비용은 어떻게 해결할까?학대가 모두 사라질까?
적어도 라파엘의집은 현재 원장님의 동생이 거주인으로 살고 있다. 다른 학부모와 매한가지의 심정이란 말이다.
탈시설을 무조건 반대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장애인이 탈시설을 하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때로는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릴 내며 밤을 보내는 이들도 있는데 모두 탈시설화 하여 가정과 그룹홈에 기거하도록 하자니...
기사에서처럼 그곳엔 학대가 만연하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보다 좋은 선생님들이 훨씬 많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내는 천사 같은 분들이다.
예전엔 김장철이 되면 학부모들이 일박 이일 동안 그곳에서 자녀들과 함께 밤을 지내며 텃밭에서 일군 배추와 무를 뽑아다 김장을 했었다.
젊은 시절 만난 학부모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를 나누며 경조사를 챙기며 지내왔다.
이젠 돌아가시는 분도, 요양병원에 가시는 분도 많아지며 자식을 보러 올 수 없는 부모들이점점 많아져 간다.
그런데 보호자도 없는 이들이 어디로 가란 말인가...
수십 년을 지내던 그곳을 떠나 중년과 노년에 이르는 시각청각발달중복 장애인들이 어디로 보내져서 사기를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해야 할까....
막상 그들의 삶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게 그토록 너그러운 사회도 아니면서....
언젠가 정지훈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항상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주변을 돌아보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태생부터 서로 돕도록 만들어졌고 그래야 한다.
원장님의 말씀처럼 라파엘의 집에서도 여러 교육과 훈련을 통해 헬렌 켈러와 같은 이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나 또한 응원한다.
스스로가 시각장애인이면서도그것에 침식당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또 다른 이의 삶을 개척한 그의 열정과 희생에 경의를 표하며 글을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