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나이까 그의 부모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장 1~3절(현대어 성경)
그랬다....
"아이고... 내가 무슨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런 자식을 낳았나 그래..."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도 많이 했길래... 이런 형벌을 받고 살지?"
"저 집 조상들은 무슨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길래 후손이 저렇게 저주를 받은 거야?"
시각장애인 당사자와 그를 낳은 부모는 물론이고 그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죄다 그랬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의식이 없지 않지만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러한 생각이 더욱 만연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 죗값을 감당하기 힘든 부모들은 제 자식을 아무렇게나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방치되고 저주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은 달랐다.
버려진 장애아들을 끌어모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교육시키는 등 사람의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또한 '너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다' '너를 통해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시다'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또다른 눈을 뜨게 했다.
그렇기에 여타 장애인및 시각장애인과 기독교는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장애인 선교는 우연히도 시각장애인 선교를 필두로 그 씨앗이 뿌려졌다.
1894년, 우리나라에 의료선교사로 오게 된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가 평양에서 부인병원과 한국 최초의 간호학교를 설립하던 중 기독교신자의 딸인 시각장애인 오봉례라는 소녀를 만나 점자를 가르치기 위해 기름종이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 책을 만들게 된 것이 장애인 특수교육의 시초이며 장애인 선교와 맹인교회가 싹이트게 된 사건이었다.
그녀는 평양 땅에 맹학교를 설립하고 안식년 동안 뉴욕 맹학교를 시찰 후 한국으로 돌아와 뉴욕식 한글점자(평양점자, 조선훈맹점자)로 조선어 기도서와 십계명을 직접 점역하여 가르치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시각장애인 자신과 조상의 죄로 저주를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 죗값을 치르며 산다는 의식이 가득했던 그들에게 성경 속 예수님의 말씀은 또 다른 해답이었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기에 필요충분한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는 하나 시각장애인이 일반 교회에 나타나게 되면 몇만 광년이나 떨어진 행성에서 온 외계인을 보듯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배척했다.
1936년 봄, 평양 남문밖교회 이창호 목사가 교회 전도실을 점자와 안마술 등의 맹인 교육관으로 사용하게 되자 교인들은 여과 없이 불평을 드러내었으며 그 결과로 서문밖 마포삼열 기념관으로 이전하게 되었지만 맹인 교회가 온전하게 설립되는 데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1930년 봄, 시각장애인이던 오현상 전도사에 의해 지금의 남산맹인침례교회(원로 강용준 목사)의 전신인 승동교회 내에 맹인전도반이 만들어진 데서 맹인 교회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는 농아와 맹인선교로 대표되는 장애인 선교 단체의 창립으로 복지프로그램을 이용한 선교활동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며 지체장애인교회가 개척되는 등 각 장애유형별로 적합한 선교 방식과 복지 사업이 구체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모든 장애인을 대변하는 용어는 병신, 불구자, 장님이란 단어가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시각장애인 소녀를 만나게 되며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데서 맹학교 및 교회와 선교단체가 설립되었고, 그곳에서는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교육, 직업, 장학사업, 구휼사업, 의료 등의 수없이 많은 결과물이 파생되었으며 실제 그러한 사업의 수혜를 입은 많은 장애인들이 불구자의 처지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곤 했다.
1910년 개교한 서울맹학교는 비록 일본인에 의해 생겨난 비기독교 학교였지만 1971년도부터 시작된 연합세계선교회의 장학사업과 이료재활교육원과 같은 직업재활을 통한 선교횔동을 통해 학교 내에 기독학생회 동아리가 결성되었고, 그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 수준으로 약 60% 이상의 맹학생들이 이 동아리에 속해 있어 학교 내에서의 교회활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로 인해 전도사와 목사 등의 교역자가 학교에 파견되어 동아리를 이끌게 되고, 주일에는 맹인교회로 출석하게 되며 졸업 후 달리 출석할 일반교회가 없는 다수의 시각장애인들이 학생 때 다녔던 맹인교회에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현재 전국에는 16개의 맹인교회가 존재하지만 남한 최초의 조직 교회가 서대문 교회라면 맹인 최초의 조직 교회는 한국맹인교회(한맹교회)다.
한맹교회는 1972년 12월, 충무교회 고등부실에서 태동하게 된다.
그 후 실로암안과병원 원장인 김선태 목사(10살 때 6.25 한국전쟁으로 실명하게 되었다.)가 한경직 목사님께 요청하여 영락교회의 지원으로 남산 아래 비탈진 그 곳에 현 예배당이 세워졌다.
일반교회에서 차별과 무시를 당하던 맹인들은 멀리 지방에서도 서울의 끝자락에서도 극한 날씨의 상황에서도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조차 학교와 고아원에 버려진 채 갈 곳 없는 그들을 내치지 않고 숙식을 제공하며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던 맹인교회는 그들에겐 어쩌면 신앙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비장애인인 나로서는 맹인교회인 애능중앙교회 임직목사인 장찬호 목사님과 인터뷰를 하며 무지한 질문을 해 본다.
"목사님, 그럼 시각장애인교회의 기준은 뭘까요? 담임 목사님이 시각장애인이라서일까요? 아니면 출석하는 교인의 몇 프로 이상이 시각장애인이어서일까요?"
"하하... 그건 시각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교회를 시각장애인 교회라고 합니다. 물론 맹인 교회는 모두 다 시각장애인 목회자가 개척을 하기도 했지만 애초 교회를 개척할 당시 모토에 의해 구별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각장애인이 모이게 되는 것이고요...
예를 들면 우리 교회에서도 시각장애인이 중심이 되어 목회, 반주, 방송, 지휘 등을 도맡아 하며 비장애인 신자들은 돕는 자라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요. 중심에 들어와 뭔가를 하기보다는 그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보행이나 식사 등의 눈 역할을 하는데 그칩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한 원리인데 제가 어렵게 꼬아서 생각한 것 같네요... 시각장애인이 중심이 된 교회라...."
"얼마 전 일반 교회를 이십 년 동안 다니다 우리 교회로 오게 된 시각장애인 성도가 그곳에선 이십 년을 다녔어도 손님처럼 다녔다며 이곳에 오니 내 집에 온 것처럼 편하다고 하더군요. 우리 교회에서는 부딪혀도 넘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스스로 보행합니다."
"맞아요. 저희도 일반 교회에 다니지만 남편이 보행하다 누군가에게 부딪히면 민폐가 될 수 있기에 아주 조심스러워요.."
"물론 으리으리한 교회들에 비하면 부족한 것 투성이지요. 불편한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이처럼 마음이 편한 교회는 없으니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눈이 안 좋았지만 비교적 잘 보는 편이라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어요. 저도 맹인교회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그런 교회가 있다는 소릴 듣고 구경이나 한 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1982년 5월에 한맹교회에 갔다가 도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9월부터 전도사직을 맡게 되고 서울맹학교의 기독교 동아리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 당시 **이(나의 남편)를 중학교 1학년때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아주 똘똘한 학생이었죠. 워낙 어린시절 친근하게 만난 탓에 나이가 오십 중반인데도 자꾸 이름을 부르게 되네요.. 어쨌든 그 이후부터 저도 시각장애인 속에 들어와 살며임직 목사가 되어 내년이면 은퇴를 맞게 됩니다"
"목사님, 1층에 '이료재활교육원' 사무실이 있던데 어떤 목적으로 만드셨나요?"
"한 마디로 직업재활을 통한 선교에 목적을 두고 있어요. 특히 중도실명자가 되면 갑자기 여러 가지 상실을 겪게 되죠. 그중 가장 시급한 게 직업의 상실이라고 생각해요. 딸린 식구들과 당장 먹고살아야지요.. 절망스러운 마음에 맹인교회를 찾아왔다가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면 직업을 갖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며 자존감도 높일 수 있구요..."
아닌 게 아니라 예전엔 주로 시술소에서 일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수요저녁예배는 낮에 드려졌단다. 그나마 요즘은 시술소에서 일하는 수가 줄어들며 저녁 시간으로 옮겨진 듯했다.
대신 스스로 밥을 차리거나 사 먹는 것이 힘든 맹인들을 위해 예배가 있는 날이면 평일이라도 식사를 준비한다.
수저를 떨어뜨려도 음식을 줄줄 흘려도 아무도 흉을 보는 사람이 없다.
문을 여닫다 손가락이라도 다칠까 봐선지 화장실 문은 자바라 형식이다. 바쁘게 교회에 도착해 얼른 식사를 마친후 예배전 화장실에 들른 남자 시각장애인들은 자바라 문이 닫혔는지 말았는지 크게 신경을 쓸 수가 없다. 보이질 않으니 어쩌다 문이 열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기도 하고, 보이는 이들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그 앞을 지난다.
지금이야 장애인법 제정으로 새로 지어지는 일정 규모의 건물에는 유도블록이 설치되어야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건물엔 유도블록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맹인 교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점형과 선형의 유도블록이 설치되어 있으며 헌금 봉투엔 묵자 위에 점자 모텍스를 붙여두어 도와주는 이도 맹인도 알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강단 앞엔 요즘 그 흔한 프롬프트도 없고, 찬송가 가사를 앞에서 낭독해 주는 사람이 이를 대신한다.
주보 또한 장애인들이 소통하는 소리샘으로 듣거나 미리 다운로드하여 사용하고, 설교 말씀 또한 시각장애인이 이용하는 소리샘으로 다시 들을 수 있다.
성경, 찬송은 대부분 한소네를 이용하지만 예배당 의자 밑엔 두꺼운 점자책이 몇 권씩 꽂혀있다.
약 6센티에 달하는 책 한 권은 교독문이고 십 센티가 넘는 점자책은 찬송가란다.
시각장애인 예배는 산만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자칫 벨소리를 꺼두지 않은 휴대폰이 울릴 때면 일일이 전화번호를 읽어주는 음성 프로그램이 너도 나도 다 들릴 수 있도록 울린다.
목사님의 축도가 끝나기 전인데도 차를 부르기 바쁘다.
"네, 지금 오세요"하는 안도의 소리를 들으니 다행히도 차량이 잘 연결되어 한결 마음이 놓이는가보다.
복지콜이 연결되는 게 쉽지 않으니 저녁 예배가 끝나고 열 시가 넘도록 집에도 못 가고 우두커니 눈을 감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이들의 딱한 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인지 목사님이라도 어쩌지 못하신다.
시술소에서 성매매업을 하는 자도, 세상살이가 너무도 힘에 겨워 술이 취해 하소연하며 우는 자도 그저 묵묵히 토닥이며 기도 하실 뿐이다.
"일반 교회처럼 그럴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일일이 이것 하지 마라 저것 하지 마라 하겠어요. 아마 하나님도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남편은 고등부 시절 맹인교회에서 실내악 지휘를 잠깐 했었고, 총각 시절 다시 실내악을 맡아 지휘를 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고부터는 맹인교회를 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상호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부모의 보행을 돕고, 뜨거운 불 앞에서 고기를 구워 제 부모를 챙기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와서 자신은 왠만해선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단다.
만약 남편이 비장애인이라면 오히려 아이들을 이끌고 맹인교회에 가서 사랑과 봉사를 가르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가 장애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일찍 철드는 것을 원치 않는 남편의 심정을 나 또한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이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비장애인 교회를 섬기는 이유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선택하더라도 늦지 않을 거라 했고, 나는 그런 남편의 뜻을 따랐다.
대표기도를 하려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단체로 찬양이라도 하려면 줄줄이 붙들려 나와 이리저리 밀고 당겨지며 세워지는 대로 서서 노래를 부른다.
대열에 맞춰 서는데만 족히 몇 분이 걸린다.
예배중에도 복지콜을 부른다며 전화를 주고 받는 산만한 예배...
비장애인이 보기엔 한없이 약한자들이모여 어설픈 몸짓으로 드려지는보잘것 없는 예배일지 모르지만 과연 예수님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