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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G G Nov 29. 2023

화는 나는데 무슨 욕구인지 모르겠다.

업무 폭탄 돌리기 시작


방학을 한 달가량 앞둔 학년 말이다. 학교에선 이 시기가 되면 올해 반성도 하고 약간은 이른 내년 교육과정의 대략적인 아웃라인을 그린다.


오늘은 부장회의가 있었다. 곧 내년에 어느 학년을 할지, 어느 업무를 할지 신청서를 쓸 때가 올 텐데 그전에 업무를 대략적으로 정리를 해두어야 한다. 수요일 전 직원 공개에 앞서서 교감선생님과 부장들이 미리 검토하여 조정하는 회의였다.


오늘 회의에서 주된 문제는 바로 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업무. 내가 학교를 떠나게 되는데 내가 하던 업무인 00 부장이라는 업무를 뒤이어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No one. Never.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왜냐면 누구도 원치 않는 업무였다. 업무량도 심각하게 많은 데다 일 년 내내 업무에 계속 신경 써야 하고, 할 일도 많고, 사람도 관리해야 하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좀 많이 짜증 나고 번거로운 3D 업무랄까.

사족을 붙이자면 나나 되니 감당한 거다. 암소리 않고 황소처럼 일만 해서 가능했던 거라고. 남들 퇴근할 때 캄캄해진 교실에 혼자 남아 울면서 업무와 씨름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하지만 남에게 징징대는 꼴 보이기 싫어 남들 모르게 눈물 훔치며 이를 앙다물고 묵묵히 일을 처리해 온 나였다. 남들은 힘든 일을 잘 해낸다며 엄지척을 올려줬지만 나는 그런 칭찬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이 황소 같았다. 업무머신이 된 기분이었다. 힘들다, 싫다, 줄여달라, 빼달라 말도 못 하는 바보 똥멍충이였다.

뭐…. 그렇게 업무를 해왔던 나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 업무가 자꾸 핫이슈 되는 게 나로서도 편치 않다. 지난번에 일차적으로 교감선생님과 내 업무에 관해 논의했었다. 잘개잘개 쪼개서 다음번에 할 사람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향으로.

하지만 아무리 쪼개놔도 00 부장이라는 그 업무는 아마 누구도 쉽게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관리자들은 여기저기 내가 하던 업무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다녀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다.

혹 나 같은 바보 똥멍충이 호구가 또 있다면 아닐지도 모를 일이지만….


암튼 업무 조정은 내 업무 외에도 다른 업무들도 비교하고 조정하며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중간에 업무 이야기하다가 내 업무를 별거 아닌 듯 쉽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갑자기 급발진해서 흥분할 뻔한 것 빼고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업무를 더 쪼개서 빼야 할 것 같은데 더 이상 떼낼 수는 없었다.(더 떼주지 않았다…)


업무 조정은 잘 마무리되었다고 쳐도

회의 전부터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운 불편함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화가 났었다.




그녀의 속사정


우리 동학년, 옆반 샘인 그녀는 평소에도 학년 일로, 애들 일로, 학교 일로,,, 매일 수시로 만나 소통하여 내 숨 막히는 업무에 관해서라면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도저히 그 업무만은 할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 내 업무를 뒤이어 맡아달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설령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최근 그녀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혼자 끙끙대며 아파하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괜찮냐고 말만 건네도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그녀였다.

나는 전적으로 그녀의 편에 서서 그런 그녀의 사정을 지켜주고 있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힘들 수 있는 시기를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기에…

그녀가 많이 힘들어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알리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도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다.


진작에 내 업무 때문에 교장, 교감선생님은 할만한 몇몇 샘들에게 계속 의중을 찔러보았으나 다들 하나같이 단호박으로 No! 그러다 결국  우리 동학년, 옆반 샘에게까지 불똥이 튈 타이밍이 되고 말았는데 급기야 다른 부장이 직접 찾아와 내가 맡던 그 업무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갔다고 한다.


나는 그게 그렇게  부아가 치밀 수가 없었다.

맨 처음에 든 생각.

자기가 뭔데 함부로 묻나?? 인사담당권한자는 교감인데.

교감도 그렇다. 본인이 그녀에게 직접 묻는 게 어려웠다면 그 부장이 아닌 나한테 부탁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동학년이고, 학교에서 그녀의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내가 아닌가.


그녀에 대한 전후사정 암것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말을 전했을지, 그 힘든 심경을 얼마나 이해했을지 …

모르는 남얘기 쉽게 하듯 다른 사람의 상처나 아픔이 가십거리로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까 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애써 잠잠하려 애써왔던 그녀의 마음을 꼬챙이로 후벼놓고만 간 것은 아니었는지 걱정도 되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


옆반 샘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심경과 사정은 공감하지 못한 채 업무 이야기만 늘어놓은 배려 없는 그 부장의 행동에 화가 났다.

회의 때 그 부장이 옆반 샘의 사정을 알아봐 줬다며 그 부장을 치켜세우는 교감의 태도에도 화가 났다.

회의 때도 그 부장이 짜놓은 내년 시간표에 수정이 필요해 보여 수정안을 냈는데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무시되고 만 것도 화가 났다.


단순한 화는 아닌 것 같다. 뭔가 숨어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안 떠올라 답답했다. 집에서 명상도 해보고 흘려보내기, 거울명상도 해보았다. 그런데도 깊이 숨어있는 감정은, 바탕이 되는 욕구는 뭐인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 부장이 나보다 어리다는 것에서 오는 열등감?

내가 더 잘났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우월감?

이도 저도 안된 것에 대한 수치심?

 더 갖고 싶은, 더 누리고 싶은 인정 욕구?

뭔가를 바꾸려는 욕구?

불편한 분위기를 맞이하는 내적 저항?

잊힐 것 같은 두려움?



지금껏 나를 돌아보며 내가 찾아본 답들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내면에 깊이 들어가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찾은 답들은 어딘지 모르게 완벽한 답이라기보다 절반 정도만 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더 깊이 들어가 봐야겠다.

꼭 찾아내야겠다.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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