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농촌에서는 ‘하다 못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붓글씨는 아니어도 펜글씨를 잘 쓰면 면서기로 일하는 시절이었다. 지역의 유지가 면장을 하던 시절에 면장에게 부탁을 하면 글씨를 잘 쓰는가에 큰 비중을 두어 임시로 뽑아 쓰다가 잘 적응하면 이른바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당시 글씨가 중요한 이유는 타자기가 보급되기 전이었고 복사기는 물론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행정을 펜글씨로 쓰고 호적등본,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에는 '기재생략'이라는 고무도장이 가득했다. 또한 당시의 호적부에는 할아버지부터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가 바글바글했다. 아들이 분가를 신청해야 호적에 분리되었던 시절이다.
호적등본상 가족이 15명이나 되니 손자손녀 취업서류를 구비하려면 3일전에 예약을 해야 했다. 신청을 받은 호적주임이 토요일, 일요일 여유시간에 따로 호적등본을 필사했다. 먹지를 대고 2부를 더 복제했다. 모든 일을 글씨로 하니 글씨를 잘 쓰면 보다 나은 보직으로 진급했다.
군청 시청과 도청의 공직에서 필체는 중요한 업무능력이었다. 인사계, 기획계, 예산계에는 명필 직원들이 발탁되고 수직승진을 거듭하여 간부가 되고 1992년 지방자치 이전까지 시장군수에 발탁 되었다.
그리고 정년퇴직 2년을 남기고 사표를 내고 나가서 농지개량조합장을 했다. 1982년에 조합장 교육업무를 담당했는데 교육생이 제출한 이른바 소원수리, 즉 수료소감문 대부분이 한자를 병용하는 명문장에 명필이었다.
1980년을 전후해서 습식복사기가 들어왔다. 국수기계에 올린 밀가루 반죽 롤처럼 생긴 두툼한 복사지에 호적부를 복사했다. 복사기 위 유리판을 잡고 좌우로 움직임을 따라다녔다. 복사기는 기능도 단순하고 복사방법도 구식이었다.
오늘 날에는 복사할 문서를 넣고 버튼을 누루면 1부, 100부 자동으로 복사가 되고 편집되고, 광고 카피처럼 ‘또 하나의 원본’이 나온다.
오늘날에는 기안, 결재, 보고서 작성을 PC 키보드로 처리하는 시대이니 손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글씨동냥’을 다녔던 세대로서는 명필의 손 맵시가 아직도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