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비판을 못 견딘다. 왜? 스스로 옳아야 하니까. 왜? 스스로 옳다고 세뇌해야 되니까. 왜? 지옥에 가기 싫은 선한 자가 되고 싶은 위선 때문에. 거짓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오로지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다.
그는 늘 상대의 의사를 밖에서 묻는다. 결정도 밖의 사람과 한다. 하지만 가족에게 의사를 묻고 결정은 밖의 사람의 의사를 기준으로 따른다. 언제나 기준은 자기 이득을 중심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언어는 일반인들이 쓰는 교훈적인 말을 사용한다.
그는 자기 목적을 위해 짧게는 세 달 길게는 일 년의 시간을 잡는다.
여름휴가 갈래? 좋은데 있는데 이번 기회 아니면 못가.
_어딘데? 뭐? 3-4시간 여름에 그런데를 간다고?
좋다니까.
_더우니까 차라리 가까운 데를 가 뭐 하러 그런데를 가?
이럴 때 멀리 찍어봐야지. 안 가본 곳을 가봐야지 그게 여행이지.
_먹지도 못하고 그런데 가기 싫어 그냥 가까운 곳 1시간 거리 가든가.
_나는 출장을 그런데 충분히 가서 가기 싫다. 왜 내가 또 그런데 가야 되냐.
오로지 자기 욕구로만 타켓팅된 휴가는 2-3개월 씨름하다 없던 일이 된다. 신혼 초 느닷없이 따라가서 국수만 먹는 경험을 3-4번 하다 난 여행을 안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런 지리지리 한 싸움이 재밌는 것 같다. 패턴을 보니 늘 밖에선 진지하고 집에 오면 얘길 하지 않았다. 그가 간 보는 것. 보통의 여성들이 쇼핑을 즐길 때 이곳저곳 아이쇼핑하듯 그는 여기 갈까 저기 갈까 대화하는 시간들로 모든 욕구를 채우고 끝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싸움 후에는 느닷없이 골프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레퍼토리는 같다. 네가 안 간다고 했잖아. 내 돈으로 내가 하는데 뭐가 문제야. 아니꼬우면 너도 돈을 벌던지.
"너도 사람, 나도 사람인데 왜 너는 100만 원밖에 못 벌어? 억울하면 너도 대기업가든가."
그의 논리는 참 심플하다. 기계적이다.
그럴 때면 나는
"그럴 거면 직원을 구하든가!!"
라고 소리쳤다.
우리의 대화는 도돌이표다.
결혼생활에 합의가 있나요?
내가 둘째 임신 중 어느 코칭장에서 만났던 결혼 생활 10여 년 된 어느 분이 그러셨다. 결혼 생활 이란 게 합의가 있나? 아 합의. 남편은 결혼 전에 서로 합의를 봐야지. 합의를 보려고 해야지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이 나름 맞다고 생각했었다. 우린 혼수를 가지고 싸웠으니까. 그리고 왜 계속 싸우는 거냐고 엄마에게 물었을 때, 어머니가 없으니 얼마나 혼자 해내기 힘드겠냐는 엄마의 이해에 동의했었다. 그는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코칭장에서 만났던 그분이 내게 던진 말은 새로운 사고를 내게 전해줬다. 내가 놓친 것이 뭔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결혼이라는 형식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내가 놓친 것은 마음, 신뢰, 다시 도덕성이었다. 그의 행태는 마치 범죄자와 비슷하고 죄라고 할 수 있는지 헷갈리는 언행 그 언저리에 있다. 나의 감정을 격하게 하고 맥락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내 잘못으로 넘어가는 억울함을 갖게 한다. 그 때문에 다시 깊은 판단이 필요하게 됐다. 삶의 모든 것에 해석이 필요하게 됐다. 본능을 믿지 못하게 됐다.
어느 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사회가 그렇잖아요. 섞여사는 거요. 이런 아이도 있고 저런 아이도 있듯이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아이는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되는 거잖아요. 화장실 청소를 할 사람도 필요하잖아요?
_아, 그런가요?
내 아이 초등 1학년 1학기 상담기간 중에 아이가 복도를 지나가는 데 같은 반 아이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우리 아이 뺨을 때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과정에서 담임선생님이 하신 말이다. 아이가 겪은 일이라 학기 초에 정확히 누군지 이름도 모를 애매한 상황에서 정황을 정확히 밝힐 수 없긴 하지만, 선생님의 대답에도 적합하지 않아 긴 대화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내게 부족한 것이 뭘까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악행에 대해서 절대적인 선은 힘이 없는 것인가.
나는 한 번도 인생에서 선의의 거짓말조차도 하질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것을 나의 준칙으로 삼아왔다. 칸트의 의무도덕처럼. 나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게 행동하라 에서 감성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그 선생님은 사건이 붉어질까 안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규율하는 자. 그런 사람과는 대화가 되질 않는다. 그들은 그렇더라도 선을 넘지는 않았잖아요? 그 후에는 요? 없었잖아요?라는 것으로 덮으려 한다. 그러면 가정 내부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당당함? 당당함은 어디서 형성될까.
7세 이전의 모든 관행, 심리, 관습, 문화 등등이 초기 유아기에 세팅된다고 한다. 그래서 교육이란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도 완벽하지 않다. 그 불안전 속에서 아이는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을 유연하게 형성해가야 한다.
법과 도덕의 경계
그 애매한 선을 자꾸 넘어서려는 자들이 있다. 사회가 불안전하니 선을 넘어서 키우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밖에서 맞느니 때리는 아이가 되라는 쪽으로 가르치려는 자들이 있다. <더 글로리> 김은숙 작가가 고2 딸의 질문에 쓰기 시작했다는 작품, "근데 엄마는 내가 누굴 죽도록 때리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내가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그 질문이 너무나 지옥이었다는 작가의 말. 나는 초등 1학년 담임의 상담시간의 충격을 가슴에 담았다. 사회는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사람. 그래도 인간성. 악마는 될 수 없잖아라는 울림. 그리고 우리 집안에는 악마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나르시시스트 남편이 있다. 나는 도대체 악행을 행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한치도 이해할 수 없어서 그 담임선생님에게 계속 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아이가 우리 아이 쓰레받기를 발로 차서 교탁밑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거예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선생님은 뒷걸음치다 발을 지그시 밟아줘야죠라고 했다.
난 각자도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교육이란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내가 생각했던 교육은 이 세상에 없어진 지 오랜 것 같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가 더 현명해 보이는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부가 싸우기 시작하면 그래서 돈은 줘?라고 묻는다. 아~그래도 일단 돈은 주네라고 끝난다.
세상은 에코이스트와 나르시시스트 그리고 보통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는 아빠에게 어려서 폭행을 심하게 당해서 그런지 보통의 정신이 없는 건가. 절대적인 선을 추구해 왔다. 인간이면 저러면 안 되지. 보통의 사람들은 어느 선까지 허용이 되는 걸까. 잘 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발을 지그시 밟아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을 난 왜 쉽게 허용할 수 없을까. 같은 행동에 같은 대처, 난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다. 힘과 힘의 겨루기,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남편은 내게 늘 이렇게 말한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 같은 시대 살고 너도 대학 나왔고 나도 대학을 나왔어. 그런데 너는 왜 100만 원밖에 못 벌지?
그들의 사고는 참 기계적이다. 그들이 선을 넘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선을 넘어도 평화로운 이유는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 선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우월하기 때문에 선을 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뀔 수 없는 것일까.
돈만 좋아하는 사람이 가족의 소중함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어요? 언제 바뀔 수 있어요?
교수님은 그러셨다.
한 번은 크게잃어 봐야 돼.
아주 천천히 바뀔 수 있어. 오래 걸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는 왜 모래무지 안으로 들어갔을까. 한 사람의 세계가 붕괴되어야 끝이 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