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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urator Deok Jun 06. 2023

환상동물, 미술 속을 누비다

1. 미술문화 속 도깨비 스토리

도깨비 하면 떠오르는 문화재가 무엇이 있을까? 바로, 도깨비 얼굴을 기와에 새긴 '귀면와(鬼面瓦)'이다. 역사나 전통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귀면와라고 하면 알만큼 귀면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동시에 전통문양이기도 하다. 흔히 귀면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박물관에 소장된 전시품일 것이다. 지금도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보면 통일신라 건물 지붕을 장식한 귀면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대부터 시작된 귀면 문양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기와 외에 단청과 벽화 등 사찰 법당 이곳 저곳을 장엄하는 대표적인 불교미술 주제로 자리 잡게 된다. 


제2화 : 고대미술 속 귀면(鬼面)의 성립과 발전


학계에서 귀면문은 현재까지도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이다. 기와에 새겨진 이 문양이 정말 도깨비가 맞는 것인가에 관한 논란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원로 미술사학자이자,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일향(一鄉) 강우방 선생께서는 귀면와에 새겨진 문양이 도깨비가 아니라 '용(龍, Dragon)'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용면와(龍面瓦)'로 고쳐 부르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언뜻 보면 용 같기도, 또 언뜻 보면 도깨비 같기도 한 귀면와, 이 문제를 본 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무겁다. 이에 이번 편에서는 귀면으로 은근슬쩍 넘기면서(?) 한국 귀면문양의 전통에 대해 알아보겠다. 

귀면문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미술사의 기원을 논하고자면 항상 두 국가가 언급되곤 한다. 바로, '인도(印度, India)'와 '중국(中國, China)'이다. 이에 한국미술 속에 등장하는 귀면문 역시 인도와 중국미술에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첫 번째인 인도미술의 사례는 바로 '키르티무카(Kirtimukha)'이다.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을 지닌 키르티무카는 '죽음의 얼굴'이라는 뜻을 지닌 '칼라무카(kālamukha)', '사자(獅子, Lion)'를 지칭하는 '싱하무카(siṃhamukha)' 등 여러 의미와 단어로 불린다. 이 가운데 영광의 얼굴로 불리게 된 사연은 인도 힌두교에 등장하는 파괴의 신 '시바(Shiva)'와 관련 있다. 바로 키르티무카를 창조한 이가 바로 시바였기 때문이다. 인도신화에 따르면 시바는 산신의 딸과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당시 산신의 딸을 짝사랑한 마왕 '잘란다라(Jalandhara)'가 이를 질투하여 부하인 '라후(Rāhu)'를 보내 혼인 반대의 뜻을 시바에게 전했다. 

이에 화가 난 시바는 자신의 이마에서 괴물을 뿜어냈는데 이 괴물은 사자의 얼굴, 불꽃같이 이글거리는 눈매 등 무시무시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괴물이 라후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자 라후는 두려운 나머지 시바에게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고, 시바는 괴물을 통제한 뒤 라후를 용서해주었다. 그런데, 잠시 후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 괴물이 굶주린 나머지 자신의 몸을 먹는 것이 아닌가!! 꼬리부터 삼키기 시작한 괴물은 이윽고 얼굴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신체 부위를 먹어 치웠다. 이를 지켜본 시바는 측은하면서도 명령에 복종한 괴물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에 괴물에게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을 지닌 키르티무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신전 입구에 그 모습을 새겨 기릴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본래 힌두교 문화 속 라후는 그리 약하지 않다. 라후는 해와 달을 삼켜 '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을 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후가 겁을 먹은 것은 키르티무카가 그만큼 막강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키르티무카를 통제한 시바는 이보다 더욱 위대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지만 위 설화를 반영하듯이 인도미술 속 키르티무카는 항상 사원 입구나 기둥에 표현되어 문지기의 역할을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에 키르티무카가 있다면 중국에는 ‘도철(饕餮)’이 있다. 중국문화에서 도철은 상당히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 험악한 인상은 ‘사흉수(四凶獸)’라고 하여 세상을 멸하는 악한 존재로 불리지만 중국 송(宋)나라 때 유행한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 즉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로도 등장해 사물을 지키는 역할도 한다. 위 내용을 빌리자면 도철이 먹을 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밥을 짓는 솥이나 술병에 새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도철은 인도신화의 키르티무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자료는 중국 진(秦)나라의 재상인 ‘여불위(呂不韋, 생몰미상)’가 편찬한 역사서인 『여씨춘추(呂氏春秋)』인데, 여기서 여불위는 “주(周)나라 솥에는 도철을 새겼는데, 머리만 있고 몸뚱이가 없는 것은 사람을 잡아 삼키다가 목구멍에 넘어가기 전 햇빛 그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물론, 머리 부분만 남게 된 이유에 대한 부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굶주림에 미친 도철의 성격은 키르티무카와 상통한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형상이 비슷햇던 도철과 키르티무카가 혼합된 현상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견해 때문인지, 도철과 키르티무카의 선후관계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종지부를 찍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두 괴수 이미지가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우리가 귀면이라고 부르는 문양으로 발전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초기 귀면문은 역시 기와, 그중에서도 수키와 끝에 달린 수막새에서 확인된다. 이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고구려(高句麗)’가 그 출발점으로 다소 투박하긴 하지만 굵고 시원시원한 선 처리는 대륙을 주름잡던 고구려의 터프한 무사 기질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형제 국가이자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펼친 ‘백제(百濟)’ 유적에도 수많은 귀면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보다 더욱 다양한 주제에 귀면문을 사용한 백제의 경우 부드러운 선 처리와 고구려에서 보기 힘든 아기자기한 구슬 문양도 곁들어져 한층 더 섬세해진 귀면문 수막새와 여러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新羅)’는? 신라의 경우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자리를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연맹 체재로 쪼개져 있던 국가들을 통합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위로는 고구려가, 바로 옆에는 백제가 자리 잡고 있으니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는 교류의 기회도 얻기 힘들었다. 고대국가 발전의 필수 코스인 불교 공인의 순서가 고구려가 372년, 백제가 384년, 신라가 527년이니 적어도 200여 년은 뒤처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해안으로는 끊임없이 일본 해적들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무엇을 하나 시도하고자 노력해도 쉬운 게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뛰어난 ‘벤치마킹(Benchmarking)’ 능력과 어려운 상황에도 노력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방이 막힌 신라는 꾸준히 고구려와 백제의 간섭을 받았지만 이를 좋은 기회의 발판으로 삼는다. 경주 '호우총(壺杅塚)'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6세기경 축조된 신라의 고분이다. 1946년 발굴조사 당시 호우총에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된다. 바로, 명문이 새겨진 청동제 그릇이다. ‘호우명그릇’이라고도 불리는 이 그릇의 바닥 면에는 4행 4자씩 총 16자의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었는데 이를 그대로 옮기면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번역하면 '을묘년인 415년, 3년 전 승하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이 된다.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신라 고분에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당시 두 국가가 관계를 뒷받침 해준다. 물론, 호우명그릇이 제작된 시기와 호우총 조성 추정 시기는 100여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에 당시 볼모제도로 신라 제19대 왕인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의 동생이었 ‘복호(卜好, 생몰미상)’가 고구려에 다녀온 기록을 토대로 호우총 주인이 복호의 후손이라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그 시기와 무덤 주인에 대한 문제 부분이 어찌 되었든간에 두 나라는 분명히 대외적으로 우호 관계를 쌓아왔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신라는 자신들보다 한 층 더 높은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귀면문 또한 함께 신라문화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물론, 신라와 백제도 관계를 쌓아왔다. 이를 보여주는 증빙자료는 연꽃 문양 기와, 즉 ‘연화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이다. 두 국가의 교류상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삼국의 연화문수막새를 살펴보자. 첫 번째, 고구려이다. 고구려 연화문수막새는 연꽃잎이 분리된 것이 확인되는데 잎 사이에 두 줄로 구획을 치기도, 혹은 고사리 모양의 꽃술을 배치하기도 하며, 분리된 연꽃잎은 마치 아몬드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 가장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기와 형태는 주로 중국 북부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북쪽과 국경지대였던 고구려가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 번째, 백제 기와는 어떨까? 백제가 고구려보다 불교의 수용 시기는 조금 늦긴 하지만 당시 화려한 불교미술을 발전시킨 중국 남쪽 국가들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고 관계도 완만하였다. 이에 백제 기와를 살펴보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귀면문처럼 연꽃 역시 부드러운 선이 두드러지며 고구려와 달리 잎 사이의 빈 부분을 T자형으로 메우는 자연스럽게 표현하거나 연꽃잎 끝을 하트 모양으로 살짝 돌출되는 방식, 중앙의 연밥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백제는 연꽃 외에 바람개비, 혹은 물결치는 파도 문양을 수막새에 새겨 넣기도 했는데 이 역시 중국 남쪽 지역에서 유행한 문양을 수용하여 업그레이드 한 것이다.

자, 마지막인 신라는 어떨까?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분황사(芬皇寺)’ 출토 연화문수막새로 살펴보자! 글쎄, 언뜻 보면 고구려 같기도, 또 언뜻 보면 백제 같기도 하다. 아몬드 형태의 연잎은 고구려 스타일이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백제에 더욱 가깝다. 두 국가의 요소가 혼재되어있지만 아직까지 자리 잡지 못한 느낌, 그렇지만 절대 외형이 별로라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심히 고민하는 신라인의 표정이 기와를 통해 투영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신라 연화문수막새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강한 선과 백제의 부드러운 면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두 국가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획득한 초기 모델인 것이다. 이에 신라 초기에 제작된 기와를 흔히 ‘고신라 와당(古新羅 瓦當)’이라고 부르며 앞으로 신라 기와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라는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즉 백제 스타일을 좀 더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두 국가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확인된다. 바로, 그 유명한 신라 최고의 건축물, 동아시아 ‘최대(最大)’ 규모를 자랑했던 경주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조성에 관한 기사이다. 때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 재위하던 7세기 무렵 서라벌, 중국에 다녀온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는 삼국을 통일하려면 황룡사에 거대한 구층탑을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기술력으로 구층탑을 건립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에 선덕여왕과 신하들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대업을 위해 일을 미룰 수는 없는 법! 선덕여왕과 신하들은 파격적인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이에 당시 공장이었던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아비지가 고향인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아비지는 곧 의심이 나서 손을 멈추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어두컴컴한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곧 그 기둥을 세우고 노승과 장사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비지는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하였다.     


아무리 서로 협력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백제가 신라 통일의 염원이 담긴 탑을 지어준다니,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위 기록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경주 황룡사지 유적에 가면 구층목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물론, 발굴조사 당시에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더 놀라웠던 것은 신라시대 지층에서 확인된 연화문수막새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신라 수막새의 연꽃 문양은 고구려와 백제 스타일이 혼재된 양식이었다. 물론, 이러한 점을 보아도 당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사실은 입증되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구층목탑 건립 기사의 경우 발굴 전까지만 해도 설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꽤 많았다. 그런데 발굴조사 결과 고신라 양식이 아닌 아예 백제 스타일 그 자체를 지닌 연화문수막새가 대거 출토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를 통해 황룡사구층목탑 건립과정에 백제 장인들이 직접 참여한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신라는 구층목탑도 완성하고 백제의 최첨단 기술력까지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이른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된 것이다! 이후, 황룡사구층목탑이 완성된 이후부터 삼국의 판도는 전부 신라 위주로 돌아가게 된다. 자장스님 말씀처럼 정말 부처님께서 신라의 염원을 들어주신 것일까? 결국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16년인 676년, 당(唐)나라와의 마지막 전투까지 승리하게 되면서 신라는 그토록 바라던 삼국통일의 염원을 이룬다. 물론,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점, 반쪽짜리 통일이라는 점 등 비판의 소리는 현재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도 뭉친 적 없는 한반도가 최초로 하나가 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신라 통일 이후 귀면은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 이는 황룡사지와 ‘동궁과 월지(東宮과 月池, 구 안압지)’ 등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건축유적에서 출토된 귀면문만 확인해도 그 변화를 알 수 있다. 기와를 살펴보면 표정부터 이빨과 수염, 갈기 표현까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쳐 마치 기와에서 튀어나와 우리에게 말을 걸 정도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통일신라 귀면와에는 위에서 잠시 훑어본 연화문수막새의 요소까지 쏙쏙 박혀 있다. 동글동글 달린 구슬 장식부터 덩쿨 모양의 고사리 장식까지, 연꽃문양을 제외한다면 뭐 하나 빠진 것 없이 튼실하게 꽉 채워져 있으며 일부는 화려한 녹색 유약까지 입혀 그 화려함을 더했다. 

이후, 통일신라 귀면은 기와뿐만이 아니라 사리함과 문고리, 불탑 등 다양한 미술 주제에 활용되었고, 이와 같은 전통은 신라에서 '고려(高麗)', 고려에서 '조선(朝鮮)'까지 계승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와의 경우 다른 주제에 밀려 다소 퇴보하는 현상이 발생된다. 하지만 괜찮다. 귀면와의 전통은 다른 불교미술에 고스란히 전해져 더욱 화려하게 장엄되어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수용과 변형, 그리고 발전...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 신라미술이 아닐까 생각된다. 척박한 환경과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외부 요소를 과감히 받아들인 개방성과 포용력, 그리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발전시키는 벤치마킹 능력, 이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비결이었던 것이다. 귀면문 역시 이와 같은 배경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함께 발전해나갔고,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미술 역시 역사 속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시대적 배경에 맞춰 변화하기 때문이다. '미술은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비유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술문화 속 도깨비 스토리> 제2화를 여기서 마친다. 마지막 제3화에서는 조선후기 장엄미술 속 도깨비와 전통불교, 민화에 등장하는 도깨비 아이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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