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4화
‘뭘, 이런 걸 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옆집에서 음식을 가져오면 어떻게 말하나요?”라는 바른생활 주관식 시험지에 쓴 답이었다. 붉은색으로 한 줄 쭉 내리 그은 채점된 시험지를 보여주며 딸은 자기 답이 왜 틀렸는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가 정답이라며 자기도 그런 뜻으로 썼기 때문에 틀린 답이 아니라고 했다. ‘저게 그 뜻이라고?’ 의아하고 궁금했지만 가뜩이나 풀 죽어 있는 아이에게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이웃이 뭘 가져오면 고마운 게 맞지”하며 방을 나오려는 데, 딸은 내게 억울한 듯 한마디 했다.
“엄마는 맨날 이러잖아. 누가 뭐 갖다 주면 ‘아니 뭘 이런 걸 다’ 그러잖아. 그러니까 내가 쓴 거도 맞지” 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저녁을 먹는 내내 식탁에서는 딸아이의 ‘뭘, 이런 걸 다’가 화제였다. 8살 아이의 순진함과 특유의 엉뚱한 매력을 지닌 딸 이야기로 웃음꽃이 만발했다. “씨 도둑질은 못한다.”라는 말처럼 성격까지 나를 쏙 빼닮은 딸아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순진하다.’라는 말은 딸아이가 성인이 된 지금도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 가운데 하나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무튼, 정답 사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간 내게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 딸은 시험지를 내밀더니 문제를 보여주며 정답을 맞혀보라고 했다.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이면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요?’에 관한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였다. ‘집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며 정겨운 시간을 보낸다.’라는 항목이 보였다. 그 항목을 짚으며 “이게 정답 아냐?”라고 묻는 나를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우리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 때문에 딸은 ‘함께 밖에 나가서 외식을 한다.’를 골랐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사회생활의 기초가 되는 학교에서 딸이 앞으로 겪게 될 일에 대한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두 번째 시험지 사건을 계기로 딸에게 세상 살아가는 스킬을 가르쳐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험을 볼 때 요령부터 시작했다. “딸, 억울한 건 알겠는데 시험 볼 때는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이나 네 생각 말고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적어야 정답인 거야.”라고 일러줬다. 딸은 내게 왜 그래야 하냐며 우리 집이 틀린 거냐고 물었다. 알겠다고 할 줄 알았던 딸의 반응에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아니고 선생님이 생각하는 정답이 있는 거라며 서둘러 부엌으로 갔다.
그렇게 말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식은 부모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배운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날이었다. 어떤 삶의 메시지를 딸에게 전하고 싶은지 딸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내 생각을 헤아려 보았다. 주변에서 순진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나를 우리 엄마 신 여사는 항상 걱정했다. 나를 닮은 딸의 엄마가 되어 보니 신 여사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건 나를 믿는다거나 못 믿는다는 신뢰와는 다른 문제였다는 것을. 어리숙한 자식이 험한 세상에서 행여 나쁜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세상에 대한 염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순진해서였을까?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빌려주면 갚겠다는 말에 속아 연락처를 적어주고 비상금을 내어준 일은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형편이 어려워 살기 힘들다는 친구 하소연에 내 자리를 넘겨주고 퇴사하기도 했다. 은인이라며 결혼 선물로 냉장고를 해주겠다던 그 친구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은 것은 물론 연락도 끊었다. 사람을 잘 믿고 많이 속았다. 하지만 그런 일로 인해 자신을 탓하거나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을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내 성향에 감사했다.
생각해 보니,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가장 크게 감사하는 일은 가족에 관한 것이다. 신 여사가 엄마라서 감사했고 딸을 첫눈에 사랑하게 되어서 감사했다. 부모와 자식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맺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을 것이다. 삶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다. 좋은 날도 있지만 때론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찾아오고 폭우가 밀려오며 가슴 시리도록 쓸쓸한 바람이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눈보라가 몰아친다. 내 삶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껏 때때로 마주한 위기와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와 닮아 사람을 잘 믿는 딸이 신뢰를 저버리는 사람들로 인해 나처럼 속상한 일을 겪게 될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험한 세상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기로 했다. 대신 감사하는 일이 많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일에서나 사람 관계에서나 불평불만이나 서운한 마음은 덜어내고 작은 것 하나라도 고마움은 확실하게 표현하는 엄마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 내가 하루에도 수십 번 딸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딸이 요즘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이 말 “고맙고 사랑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