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
누리가 온 지 5년이 됐다. 똘망똘망한 눈에 사시사철 마를 생각 없는 코, 부드럽고 새하얀 털의 이 말티즈는 5년 전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왔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들려오는 녀석의 우렁찬 소리는 피곤한 하루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러나 녀석만 있는 것이 아닌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내게는 15년의 세월을 견뎌온 또 다른 한 마리의 생명이 있다. 이 적자의 이름은 ‘오키’, 시츄다.
- 네가 막내지만 남자니까 엄마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우리 아들 잘할 수 있지?
중학교 2학년, 나이가 찼다면 찼고 어리다면 어린 시절의 나를 자신의 차로 은밀히 불러 말하는 아빠였다. 나름 머리가 컸다고 생각해 영혼 따위 없는 긍정의 대꾸를 하는 동안 내 눈은 백미러와 앞창, 다시방을 정처 없이 살피고 있었다. 두 살 터울의 누나는 아무래도 엄마한테 들었나 본지 훌쩍이는 소리가 방을 뚫고 나왔다. 그렇게 이혼가정이 된 우리 가족은 둘로 나눠지게 됐다. 누나는 아빠의 손을 붙잡고 떠났고, 엄마와 나는 집에 남았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부담된다는 엄마의 만류에도 오키라는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내 삶에 들어왔다. 배변 패드를 갈고 밥을 주기적으로 줘야 하는 일이 때론 귀찮았지만 녀석이 꼬리를 흔들고 내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반쯤 꺾을 때마다 마음 한켠 어두운 곳의 조명이 켜지곤 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의 누리처럼 오키도 현관 앞에 발을 디딜 때면 아파트 전층에 퍼질만한 큰 소리로 나를 반겼다. 나는 바닥에 누워 녀석의 눈높이를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고, 녀석은 내 얼굴 곳곳을 핥고, 또 그게 좋아 세수를 아까울 정도로 녀석을 사랑했다. 일을 나가는 엄마의 뒤를 따라 집을 나오려 할 때마다 오키는 자기도 나오고 싶어 내 꼬리를 줄줄이 밟았다. 그럴 때마다 같이 데려 나오지 못하다는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며 오키를 집안에 다시 두고 나오곤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누리가 들어오고 다시 5년이 지나 나는 서른 즈음이 됐다.
이제 더 이상 오키가 우렁차게 울지 않는다. 자기 침대에 누워 고요히 방바닥만 응시할 뿐이다. 또다시 눈높이를 맞추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내 얼굴을 핥는 대신 멀리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오는 누리를 경계한다. 난 오키를 편애한다. 누리가 앞발로 내 팔을 아무리 긁어도 난 오키를 품에 안는다. 누리 녀석도 작고 귀엽지… 네가 싫은 게 아니란다. 그냥 내 삶이 지옥일 때 내려온 나만의 천사 오키가 더 좋을 뿐이란다.
- 오빠 이제 우리 헤어지자.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녀에게 이별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에 있는 한 애견호텔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태어난 지 이제 한 달 정도 되는 작고 귀여운 시츄 한 마리가 벌건 대낮에도 쥐 죽은 듯 잠들어 있다. 하늘로 다시 올라간 오키가 떠올라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옆에 있는 말티즈는 그 안이 답답한지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다. 사진, 편지 등 그녀와의 추억들이 정처 없이 방바닥에 퍼져있다.
- 언제 정리하지?
괜한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누리가 어느새 내 팔을 긁고 있다.
- 그래, 누리야. 산책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