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오시마로 떠난다.
다카마쓰 항구에서 나오시마 항구로 들어가는 배는 두 종류다. 페리라고 부르는 대형 유람선과 고속 여객선은 매표소도 승선 장소도 다르니 잘 찾아가자. 나오시마에는 미야노우라와 혼무라, 두 개의 항구가 있는데 주로 미야노우라 항구를 이용하게 된다. 아무리 여행 중이라지만 7시 20분 배를 타겠다고 꼭두새벽부터 움직일 수는 없으니 8시 12분 페리가 적당해 보인다. 9시 20분 배는 고속선으로 페리보다 20분 정도 덜 걸리지만 가격이 두 배가 넘는 데다, 통통배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한 작은 배라서 나오시마로 들어갈 때는 굳이 추천하지 않는다. 특히 캐리어를 들고 움직이는 상황이라면 무조건 페리를 이용하시라. 널찍하고 좌석도 충분하고 커다란 창문이 가득하여 내내 바다를 내다볼 수 있다. 철썩이는 물결과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나오시마에 도착한다.
그 후로도 띄엄띄엄 배가 있지만,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나오시마에 느지막이 들어갈 이유도 없으니 늦어도 10시 14분 배는 타도록 하자. 눈 뜨자마자 페리 안에서 먹을 간식을 준비하여 항구로 간다. (배 내부에 음료자판기는 있다)
참고로 배 표를 미리 사두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터넷 예매? 그런 거 없다. 승선 시간 3, 40분 전에 매표소가 잠깐씩 열린다. 결제도 현금만 가능하다. 인공지능이 육아를 도와줄 날이 머지않은 듯 보이는 요즘 세상에, 이런 오래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불편함이 오히려 중년 이상의 연령대에게 어필하는 건가,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아날로그, 과거, 추억, 어린 시절 등의 말과 개념들이 뒤섞여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한 아스라한 감정이 나오시마의 풍경과 섞여 든다.
페리 오른쪽 창가에 자리 잡으면 나오시마가 가까워지며 빨간 호박이 보인다. 빨간 호박이 보이면 내릴 준비를 한다. 처음 페리를 탔을 때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려고 내게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운 삼두와 이두에 힘을 주려는 찰나, 친절한 직원분이 엘리베이터로 이끌어 주셨다. 천사이신가. 캐리어 끌고 이동하시는 분들은 꼭 기억하시길. 배 앞쪽 출구 구석 어딘가에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다.
나오시마에 발을 들여놓기 전, 알아야 하는 두 인물이 있다.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는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나오시마를 거니는 내내 그 존재감을 지나칠 수 없으니, 한둘이 아닌 그의 작품을 방문하는 그때그때 언급하면 되리라. 이 섬을 ‘안도 타다오의 나오시마’라고 호명하는 걸 여기저기서 보았는데, 글쎄, 굳이 소유격을 쓴다면 ‘후쿠타케 소이치로의 나오시마’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나오시마를 배경으로 하는 베네세 그룹의 회장 후쿠타케 소이치로의 업적은 동화 같은 면모가 있다.
옛날 옛날에(사실은 고작 삼사십여 년 전에) 후쿠타케 서점 후계자인 소이치로 왕자님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도쿄 생활을 정리하고 서점 본사가 있는 오카야마로 이동한 그는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을 느꼈다고 하지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오시마에 청소년 캠프장을 설립하려는데, 그 시기 나오시마를 비롯한 세토내해 섬들은 불법 산업쓰레기 투기로 아름답던 자연이 많이 훼손된 상황이었다네요. 그는 죽어가는 섬을 예술의 힘으로 살려내겠다고 결심하지요.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상상력과 실행력, 그리고 그것들을 행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어요. 섬의 반을 사들이고(왠지 현금 일시불로 샀을 거 같지 않나요) 안도 타다오를 끌어들였어요. 오염된 환경을 복구하고, 미술관을 품은 호텔을 설계하고, 재투성이 신데렐라를 근사하게 치장해 주는 마법사처럼 차근차근 나오시마를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했지요.
나오시마가 지금의 ‘예술의 섬’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된 것도, 여러 미술관과 예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가 된 것도, 인구 감소와 노령화 등 섬 지역의 흔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피해 가지 못했던 나오시마 주민들이 지역 재생의 성공 사례 주인공이 된 것도, 후쿠타케 소이치로가 무모한 계획을 실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재력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불가능했겠지만, 그의 진정한 능력은 재력보다는 오히려 상상력과 상상을 실현시키는 실행력이 아니었을까. 그가 죽어가는 섬을 되살리는 방안으로 골프장이나 카지노가 아닌 예술을 선택해 주어, 진심으로 고맙다.
여담으로, 일본에 사는 친척동생이 명절에 방문했을 때 후쿠타케 소이치로와 베네세 그룹을 털어보라고 시킨 적이 있다. 한국어와 영어로는 이미 검색해 봤지만 일본 기업의 논란은 역시 일본어로 알아봐야지 않겠나. 좋은 건 됐고 나쁜 얘기만 가능한 지점까지 탈탈 털어보라고 하니, 동생의 어머니인 숙모님께서 넌 대체 성격이 왜 그 모양이냐는 표정이셨다. 좋은 일을 한 사람의 치부를 굳이 들쑤시려는 의도로 보였겠으나, 그런 성가시고 비틀린 취미는 없답니다, 숙모님.
그때 이미, 죽을 때까지 나오시마를 들락이겠구나, 시키지도 않은 나오시마/베네세 홍보대사처럼 살겠구나 예상했는데, 온마음으로 찬사를 바칠 대상이 알고 보니 땅콩이든 올리브(지역특산물이다)든 시비를 걸어 배를 돌려라 말아라, 내려서 헤엄쳐가라 말아라 등의 갑질을 일삼는 사람이라면 곤란하다.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직원들을 착취하는 사람이어도 곤란하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이어도 곤란하다. 매우 곤란하다.
다행히 동생은 별다른 기사를 찾아내지 못했다. 회장직에서 물러나 뉴질랜드 이민을 간 것이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서다,라는 내용 정도가 시비를 걸려면 걸 수 있는 사안이겠으나 재단의 예술지원활동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기사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불법행위나 갑질은 아니니 일단 신경 끄고 마음 놓고 떠받들어도 괜찮겠다 결론 내렸다.
나오시마 프로젝트가 영화라면 그 엔딩 크레디트에는 후원자 겸 제작자 후쿠타케 소이치로, 감독 안도 타다오,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주연 및 조연에 유수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잔뜩 나오고, 제작스텝 명단에 주민들의 이름이 수록되면 적절하겠다.
후쿠타케 소이치로의 나오시마든,
안도 타다오의 나오시마든,
나오시마의 나오시마든,
나오시마에 발을 내딛는다. 마침내.
(나오시마에서 만나게 될 풍경 한둘 혹은 일곱 )
노란 호박을 바라보는 니키 드 생팔의 고양이를 바라봄
스기모토 히로시의 유리 다실 몬드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