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공문으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문서는 공무원 업무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일부 기술·기능 직렬을 제외하면 공무원은 언제나 공문으로 업무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이렇게 공무원 업무가 문서 위주인 이유는 행정의 본질적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다. 행정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항상 엄정해야 하고 명확해야 하며 그 근거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공적인 권력이 사적으로 쓰여질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행정은 행정의 선택이 합리적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하며, 합리성의 전제조건은 투명성이다. 투명하려면 누구나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행정은 수많은 문서를 남긴다. 국민 누구나 원하면 볼 수 있고 검토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문제는 문서주의가 너무 과도하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다.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과 업무추진은 곧 조직의 경쟁력이다. 공무원 사회는 여전히 70~80년대 문서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쓸데없는 문서를 너무 많이 생산하고 있으며, 꼭 필요한 문서라 할지라도 1페이지면 될 것을 10페이지를 만드는 식이다. 문서가 많다고 업무검토가 꼼꼼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국민의 알 권리가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행정의 투명성을 침해한다. 너무 문서가 많으니 무엇이 핵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고 그 문서량에 질려 나가 떨어져버리고 만다.
공무원이 생산하는 문서의 종류는 대략 3가지다.
1. 내부 보고서
2. 공식 결재문서
3. 회의자료
우선 내부 보고서는 정책추진과정에서 관리자의 의사결정과 검토를 위해 생산하는 문서다. 공식문서는 아니기에 그 목적만 달성되면 사실상 폐기되며, 문서 작성자가 잘 보관하고 있지 않는 이상 사후관리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무원 조직 내부에서는 공식 결재문서보다도 오히려 중요성이 큰 경우가 많다. 이 보고서를 통해 관리자는 직원의 업무 역량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관리자마다 원하는 문서의 스타일은 가지각색이다. 팀장이 원하는 부분이 있고 과장이 원하는 부분이 있고 기관장이 원하는 부분이 있다.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한 명인데 상사들 모두가 이러니 저러니 지시를 한다. 결국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다가 이도저도 아닌 잡탕 문서가 되기 일쑤이며 실무자의 행정력만 쓸데없이 낭비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팀장이 지시한 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더니 그 방향성과 완전히 다르게 과장이 지시하여 그동안의 작업이 허사로 돌아가버린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기관장이 또다시 예상치 못한 지시를 하면서 문서 자체가 쓸모없어져 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품의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다.
이런 사태가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는 해법은 간단하다. 최종정책 결정권자의 업무방향성을 미리 물어보고 그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하면 만사 OK다. 과장이 최종결정권자인 보고서라면 과장에게 보고서의 주제를 미리 구두로 물어보고 그 답변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하면 되는 것이다. 중간관리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못하는 단점은 있지만 일의 효율성을 따졌을 때는 이 방법이 맞다. 문서의 세밀한 부분은 결재 과정에서 수정될 수 있을 지라도 문서 전체가 쓸모 없어져 처음부터 다시 맨땅에 헤딩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초등학생도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이 방안이 공직에서만큼은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케케묵은 관습 관례가 문제다. 상사에게 무엇인가 보고를 하거나 물어볼 때 문서자료 없이 구두로만 물어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편견, 언제나 상사에게 문서로 보고해야 한다라는 공무원 사회만의 암묵적인 룰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로변에 나무를 심는다고 하자. 벚꽃나무를 심을지 버즘나무를 심을지 은행나무를 심을지 나무의 종류를 정해야 한다. 나무마다 가지고 있는 특색을 잘 알고 있는 실무직원이라면 별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결정권자에게 가서 어떤 나무를 심을지 물어보고 답변을 받으면 된다. 그 어떤 문서도 사실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시니어 공무원에게 이런 행위는 예의없고 싸가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상사에게 의견을 물어보러 오는데 감히 ‘문서’ 없이 와서 말로만 이러니 저러니 떠들었다는 이유다. 반드시 각 나무별로 특성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해서 결정권자에게 가져다 주면서 의견을 물어야 하는 꼰대식 관습이다.
보고서의 질보다 양을 따지는 관례도 공무원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보고할 내용이 다섯줄밖에 없다면 다섯줄만 작성해서 서류를 만들면 된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이 또한 상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예의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관습이며 꼰대짓일 뿐이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붙이고 옮겨붙이고 없는 말도 만들어내서 한 페이지를 꽉 채운다. 도저히 글을 지어내지 못하겠으면 이미지 자료라도 집어넣어 양을 채우고야 만다. 신규 공무원들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나중에는 체념하고 알아서 텍스트를 구겨넣게 되며 나아가 이게 옳은 방식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까지 생기게 된다.
두번째로, 공식 결재문서는 외부로도 공개되고 법적으로 영향력을 인정받는 말그대로 공문을 의미한다. 공문은 100% 전자문서(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문서)로 작성하고 결재도 관리자가 컴퓨터 상으로 클릭하여 결재하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기록시스템 서버에 남는다. 같은 기관의 공무원이라면 10년 20년이 지나도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공문은 업무지침이나 법령이 작성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법령에서 ‘~~절차 진행 시 의회와 협의하여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으면, 의회와 어떤 내용으로 협의했고 정확히 누구와 언제 어디서 협의했으며, 협의결과는 무엇인지 공문 형식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실제 협의를 아무리 꼼꼼하게 했다 하더라도 공문이 작성되어 있지 않으면 협의를 했는지 안했는지 실제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귀찮지만 문서로 남겨놓아야 한다.
법령이나 업무지침에 근거가 없더라도 공문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공공기관이 자율적 판단에 의해 어떤 사업을 진행할 경우다. 먼저 내부 보고서를 통해 업무추진방향이 결정되면 실무 공무원이 공문을 작성하고 팀장, 과장, 기관장 등 관리자들이 결재함으로써 실제 현실에서 일을 추진하게 된다. 꼭 공문을 남겨놓아야만 하는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이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먼 훗날 후임 공무원들이 일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최근 정보공개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일반 국민들도 공무원이 생산하는 공문의 대략 90% 정도는 정보공개 사이트에서 열람해 볼 수 있다.
공식 결재문서에 대한 공무원의 불만은 거의 없는 편이다. 법령이나 업무지침에 공문 작성 근거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공문을 작성해 놓지 않으면 후일 감사부서에 발각되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공무원 업무 특성상 공문을 작성하는 일은 새로운 일이라기보다는 매월 매년 반복되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동안 기관에서 수년간 작성해 왔던 공문 형식이 있기 때문에 과거문서를 참고하여 그대로 작성하면 되므로 특별히 스트레스도 없는 편이다. 법이 새로 제정되거나 업무프로세스가 완전히 바뀔 때에는 맨 땅에 헤딩하듯이 문서를 작성해야 하므로 실무직원의 고생이 크지만 정말 운이 나쁜 경우가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공무원에게는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행정은 보수성이 강해 무언가 국민에게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큰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 관련 법령이나 업무지침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실무 공무원들이 가장 스트레스 받는 문서는 바로 회의자료다.공무원이 회의를 열면 무조건 회의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실제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은 자료가 필요하다. 단순 미팅이나 간담회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편안하게 인사하고 식사하는 자리에서마저 회의자료를 준비하여 서로 공유한다. 회의의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조직 내부적으로는 주 1회 정도 간부(관리자) 회의가 있고, 외부업체와의 미팅, 의회 등 관련 공공기관 간의 모임도 수시로 개최된다.
회의를 하면 회의안건이 있어야 하고 당연히 회의자료도 필요하다. 하지만, 회의자료를 기획하고 만드는 과정이 질보다는 양,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형식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실무 공무원의 피로도가 가중된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자료를 보게 되기 때문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부담감이 크다.
어떤 문서든지간에 실질내용보다 형식을 따지는 공무원 문화는 한시바삐 없어져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가장 싫어하는 문서형식이 PPT였다. 문제의 핵심을 ‘생각’으로 맞서지 않고 PPT가 보여주는 화려한 이미지와 동영상들로 비껴가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글로벌기업 아마존의 회의문화는 귀감이 될만하다. 아마존에서는 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방대한 회의자료 대신 간단한 메모지만으로 회의를 진행한다. 메모지에는 회의안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그 글만 읽으면 쉽게 안건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마치 일대일로 말하듯이 구술형으로 텍스트만 작성한다. 일체 표와 동영상, 이미지 등 자료를 활용하지 않는다.
공무원 문서는 정반대다. 글도 많고 사진도 많고 통계도 많고 자료가 풍성하다. 글씨폰트와 크기, 줄간격 등 문서형식도 이보다 더 깔끔할 수는 없다. 바로 책으로 내도 될 정도의 문서 퀄리티를 자랑한다. 하지만,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처음 보는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다.
젊은 공무원들은 이미 어떤 문서형식이 효율적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공직 경력을 쌓아가면서 팀장 과장 등 선배 공무원들에게 이런 쓸데없는 문서 작성법을 하루하루 배워나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옳은 신념’을 잊어버리고 이런 식의 문서작성법이 공무원의 진짜 실력인 줄 착각하게 된다. 착각하지 않는 공무원도 감히 이견을 제시할 수는 없다. 여러번 반복하지만 공무원은 군대만큼 강한 절대복종 사회다. 다양한 의견은 필요없다. 오로지 상사의 뜻대로 진행할 뿐이다.
공무원은 문서로 말한다. 문서 작성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문서를 잘 만드는 공무원이 일 잘하는 공무원이다. 우대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문서가 과연 잘 작성된 문서인지에 대한 고민이 공직사회에는 없다. 그저 70~80년대부터 이어지던 고루한 과거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지금도 한 페이지 정도면 충분할 내용의 문서를 두세 페이지로 늘려 작성하기 위해 애쓰는 공무원들이 있을 것이다. 한두줄 텍스트로 설명하면 될 내용을 이쁘게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동그라미도 그리고 네모도 그리고 초등학생처럼 색칠공부하는 공무원도 있을 테다. 단순한 문서 결재권자의 취향에 불과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이며, 아무도 주의깊게 읽어보지 않는 그 한두 페이지의 쓸데없는 문서량을 채우기 위해 오늘도 9급 공무원들은 야근을 하고 주말에 출근을 한다. 해결책은 명징한데 시행할 수 없는 뻣뻣한 공직문화에 좌절감만 더 커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