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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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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우리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초등학교는 한 해의 마무리가 1~2월이다. 새해가 밝아도 3월이 오지 않으면 영 새롭지 않다.

2023학년도는 그 어떤 해보다 아이들이 착하고, 학부모님들은 협조적이었으며, 업무는 편안했고, 관리자가 주는 과중한 눈치나 부담도 없었다.

물론 이것은 작년과의 비교로 인해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작년에 맡았던 한 비범한 아이로 인해 나의 기준은 매우 하향평준화되어 있었다..)

이제 아이들과 함께 할 날이 일주일 남짓.. 다음 주 목요일이면 종업식이고 거기다 나는 학교까지 옮기게 되어 우린 기약 없는 이별을 앞두고 있다.


겨울방학이 지나고도 쫀쫀하고 치밀한 학습으로 아이들을 곱게 키워 올려 보낼 예정이었던 나는 [서예]라는 거대한 과제를 이 시기를 위해 남겨뒀었다.

지난주에 첫 수업을 위해 아이들에게 새 붓을 나눠주면서 

"자 모두 포장지를 벗기고 붓을 위로 드세요! (라이언킹의 한 장면처럼)

선생님 따라 외치세요. 부디 한석봉 같은 명필로 거듭나게 해 주십시오!! 

자 외치면서 붓대에 뽀뽀 한번 쪽! 하세요. 이게 바로 여러분을 명필로 거듭나게 해 줄 한석봉 붓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분명 붓 포장지에 한석봉 붓이라고 적혀있었다.)


나의 화려한 언변에 큰 기대를 가졌던 아이들은 서예라는 막강한 산을 넘지 못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선생님 붓이 자꾸 갈라져요" "선생님 저 수전증 있나 봐요" "선생님 저 팔이 아파서 못쓰겠어요" "선생님 글씨가 자꾸 삐뚤삐뚤해져요" 하나뿐인 나를 갈래갈래 쪼개버릴 만큼 원성이 자자해졌다. 


달래가고 칭찬해 가며 두 시간씩 두 차례의 서예 수업을 마치고 세 번째 서예수업을 앞둔 오늘!

수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 쉬는 시간부터 달갑지 않다는 볼멘소리가 들려 서예인 듯 서예 아닌 서예 같은 수업으로 바꾸었으니 이름하여 사사백일장!!(4학년 4반 백일장)

붓글씨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라고 붓펜을 나눠주고 '2023년''우리 반'을 주제로 백일장을 열었다.

이런 잔꾀에 속지 않는 영리하되 게으른 학생은 또다시 글쓰기가 싫다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입을 단속하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참을 선언했다. 

"선생님도 쓸 거예요! 우리 전부 다 쓰고 같이 감상합시다!"

한 시간은 구상하고 붓글씨를 연습하였고, 남은 한 시간은 화선지에 쓰고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였다.

아이들 작품 감상이 끝난 후 아이들이 띄워주는 운에 따라 내 오행시를 발표..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와~~ 하고 손뼉 쳐주었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2PM인 줄 알았던 2AM의 '죽어도 못 보내'를 틀어주었다.

울음을 참아내는 기특한 녀석들.. 아.. 너희들과 헤어지고 나면 아쉬움이 좀 오래갈 것 같구나....


아이들에게 읽어줄 요량으로 쓰고 났더니 뭔가 섭섭하다. 아이들에게는 이 마음이 진심이지만 19금 버전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을 보낸 뒤 다시 붓펜을 들었다. 

차마 브런치에 욕을 쓸 수는 없는지라 고르고 골라 아름답고 적절한 단어로 마무리해 본다.

제발 상식이 통하는 학교, 상식이 통하는 학년, 상식이 통하는 학생, 상식이 통하는 학부모를 만나게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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