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학부모님 면전에서 차마못한 이야기들, 통지표 2편

초등학교 통지표 문구,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1편을 먼저 읽고 오시길 추천합니다. 1편 읽고 마음에 와닿지 않으면 읽지 마세요. 직업 걸고 적는 거라 뜻밖에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고 멍들까 봐 몹시 쫄면서 적습니다. 웃자고 쓴 글은 아니지만 달려드시면 저 상처받아요. 

또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댁의 귀한 자녀를 깎아내릴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가르치며 벌어먹고사는 사람인지라 모든 아이들이 잘 성장하여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소망이기도 합니다.  


학부모님 면전에서 차마못한 이야기들, 통지표1 (brunch.co.kr)


<초등학교 통지표에 자주 언급되는 내용,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성이 곱고 착하며

→ '모든 아이들은 본디 심성이 곱고 착하다.'는 생각이 있어야 교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학생으로 인해 힘이 들 때 '이 아이도 원래 심성은 곱고 착하다'는 주문을 서너 번씩 스스로 되뇌어야 참을 수 있달까요? 일부러 고약하게 군다고 생각하면 1년을 어찌 견딜지.. 고로 이 문구는 모든 아이들에게 써 줄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진짜 심성이 곱고 착해서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심성이 곱고 착하다'는 문구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3명 이상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심성이 곱고 착하다'는 문구가 적힌 통지표를 받았다면 우리 아이의 심성은 조선시대 중전마마급만 입을 수 있었던 비단옷만큼 부드럽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의적이고

→ 맘카페에서 의견이 분분한 문구가 창의적이란 표현이던데 진짜 창의적인 아이에게 써주기도 하고 교사의 지도범위를 벗어나는 비범한 학생에게 써주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생각에 그치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어 분위기를 흐리는 안타까운 아이도 '창의적'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기도 하지요.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여학생: 미적 감각이나 예술적 감각이 뛰어남. 남학생: 운동신경이 좋아 다양한 체육활동에 두각을 나타냄.

→ 남녀 성별에 따른 고착화된 편견 같지만 실제 비율로 따져보면 이 말은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반대로 남학생인데 미적 감각도 뛰어나고, 여학생인데 운동 신경이 좋은 아이들은 정말 고른 재능을 가진 축복받은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건 삶을 더 즐겁게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발표함.

→ 초등학생들이 점점 말을 잘하고 있습니다! 간혹 '이 아이의 말빨에 제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를 중얼거리며 정신을 다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말하기 능력은 비슷한데 예전의 학생들은 마음에 담아두고 여과를 거쳐 표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양육환경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의 표현력이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리 있게 발표하는 것은 사실 대부분의 학생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고 그저 좋아 보이는 문구이지만 이 문구가 가진 치명적 단점이 있는데 '조리 있게 말하기'에서 끝나면 진짜 말만 잘하는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말도 잘하지만 듣기도 진짜 잘하는 아이는 '조리 있게 말해서 모둠활동에 기여하고', '조리 있게 말할 뿐 아니라 친구의 의견을 잘 경청하고', '조리 있게 말하고 의견이 다른 친구와도 서로 의견을 잘 조율함'으로 끝납니다. 어쨌든 해가 갈수록 학생들의 말하기는 발전하고 듣기는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추세라는 생각....  하지만 듣기 없는 조리 있는 발표만 있다고 해서 말만 잘한다는 생각에 아이를 몰아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가 진짜 말만 잘하는 아이인지 듣기도 어느 정도 되는 아이인지는 부모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저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한 번씩 일깨워주면  됩니다.


독서습관이 잘 정착되어 있음.

→ 아침에 등교 후 독서하기가 학급 약속인 경우가 많습니다. 3월은 진짜 잘 운영됩니다. 책을 실제로 읽든 펴서 들고만 있든 학생들의 모습은 독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5월이 지나면서부터 진짜 독서 습관이 드러납니다. 책을 펴고 있지만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거나 입으로 친구와 대화를 하거나.. 

이 문구가 적혀 있는 아이는 독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경우가 많을 겁니다. 특히 학년말에도 학교도서관에 가서 꾸준히 책을 빌려 읽고, 간혹 짬이 날 때 자연스레 책을 꺼내 읽으며, 책을 읽다 그만 읽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아쉬워하지요. 어릴 때는 책을 곧잘 읽던 아이가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독서를 멀리 하는 경우도 많은데 자기 수준에 맞는 책, 다양한 분야의 책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면 그것이 가속화되기도 합니다.  4학년 이상이라면 일상생활 이야기를 담은 창작동화뿐 아니라 환경,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도덕 같은 요소가 어우러진 수준 높은 책을 통해 아이 스스로 '내가 독서를 통해 배우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  개인적인 의견이 조금 더 반영된 해석임을 먼저 밝힙니다.(물론 많은 교사들이 공감할 것이라는 자신도 있지만..) 자기주장이 강해서 좋지만 때로는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데 굽히는 경우가 거의 없을 때 적습니다. 초등학생의 경우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내 의견이 제일 좋고 내 의견대로 하는 것이 가장 멋진 결과물을 만들 것 같더라도 다른 친구의 의견을 들어보고 어느 정도는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배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초등학교에서 하는 거의 모든 활동은 '잘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결과물을 공유할 때도 잘하고 말고를 평가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하거나 경쟁의식을 가진 학생들은 간혹 내 의견만 고집하거나 상대방 의견의 단점을 꼬집으며 대안 없이 반대하기도 합니다. 똑똑한 학생이 이럴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럴수록 교사입장에서는 더욱 안타깝습니다. 조직의 리더일수록 조직구성원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 중요하니까요.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일수록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 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고 서로 조율하여 양보하고 배려하는 경험을 자주 갖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소수의 친구들과 어울려~, 자신과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 두루두루 어울리는 편은 아닙니다. 단짝도 좋지만 여러 친구들과 소통하는 모습도 보고 싶을 때 적습니다. 여러 친구들과 조금만 더 어울리면 훨씬 다채로운 학교생활을 할 거 같은 안타까운 마음에 언급하지요. 물론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춘기 전에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친구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고 모둠원을 달리 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기도 하지요.


~을 노력한다면 발전이 기대됨. ~한다면 더 큰 성취가 기대됨.

→ 조금 직설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문구임을 먼저 밝힙니다. 

노력하면 발전할 것 같은데 당최 노력을 안합니다! 오해가 생길까 덧붙이자면 노력해도 안될 아이에게는 이 문구를 아예 적어주지도 않습니다. 아마 아이보다 제가 더 많이 노력했을 겁니다. 이 아이가 노력을 기울이도록 말이지요. 물론 수십 명의 학생들과 함께 하는 교실이라 '네가 우리 아이 한 명만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냐?'라고 되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보다는 분명 더 했을 거라 장담합니다. 제가 한 만큼 똑같이 부모님께서 노력하셨다면 아이는 이 문구를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열 명의 교사보다 한 분의 부모님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훨씬 더 강력합니다. 

이 문구는 교사가 일 년을 거쳐 가르쳤는데 아직도 특정한 부분에서는 아이의 노력이 더 필요하단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이게 과연 아이만의 문제일까요?


경청(또는 협력)을 통해 공동의 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함.

→ 좋은 문구입니다. 모든 교사가 바라는 학생의 모습일 겁니다. 모둠활동을 하면 리더의 자질을 발휘하는 아이입니다. 활동 과정에서 다툼을 만들지 않으며 의견 충돌의 상황에서 대처능력도 뛰어납니다. 이런 아이가 24명 기준 6명만 있어도 우리 반 모둠활동은 문제없습니다. 이런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모둠활동을 많이 할 수 있고 아이들이 원하는 자기주도적, 즐겁고 흥미로운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아이가 거의 없다면 교사는 모둠활동시간 10분을 준 이후 어느 모둠에서 일어난 불화를 중재하기 위해 15분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실 수업의 형태나 질이 당연히 달라지겠지요.


지금부터는 예전에는 많이 써주었으나 갈수록 쓰는 빈도가 줄어드는 문구입니다.


글을 잘 씀.(국어 교과평어 말고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에서의 언급에 한합니다.)

→ 국어교과는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를 고루 가르치기에 어떤 한 항목에서의 글쓰기를 잘하면 글을 잘 쓴다고 적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에서는 진짜 글을 두루두루 잘 쓰는 아이에게 이 문구를 적어 줍니다. 그리고 개인적 의견이지만 요즘은 갈수록 이 문구를 쓰기가 주저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의 문해력이 낮아짐을 느끼는데 글쓰기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는 것 같고 학습활동을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노력을 최소화하려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글쓰기 지도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주제글쓰기 활동을 하는데 쓰기 전 동기유발을 위해 제가 쓴 글을 칠판에 한 바닥 적어 보여줍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이들 모두 그 글을 읽었고, 반 정도는 글쓰기를 재미있어하면서 자신만의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그 글을 읽는 아이의 수가 줄고, 오늘의 주제만 확인하며, 글을 쓸 때 "몇 줄 이상 써야 해요?"를 물은 후 선생님이 통과해 줄 정도까지만 적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지도는 저에게도 숙제입니다. 올해는 진짜 더 공을 들여야겠습니다. 아자!


최선을 다하여, 책임을 다하며

→ 흔하디 흔한 이 문구도 요즘은 적어주기가 참 어렵습니다. 일단 늘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지요. 어느 정도 성실한 학생은 많지만 활동에 따라 요령껏 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활동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책임을 다하는 학생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아이들의 생활이 팍팍해진 탓이 가장 큽니다. 쉬는 시간에도 학원 숙제를 펴놓고 해야 하고 방과 후에는 10분의 시간 여유도 없이 바로 학원으로 내달리듯 가는 아이들이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곳은 학교이기에 학교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다 쓰고 하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개인마다 수행시간이 차이가 나는 활동을 했을 경우 "선생님 저는 쉬는 시간에 학원 숙제 해야 하는데 덜 한 거 집에 가서 하고 내일 내도 되나요?"라고 묻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럴 때 "응 당연하지. 그렇게 해"라고 대답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저렇게 말하는데 차마 대충 해서 내라고 못하겠다'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유난히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하면서 머리 맞대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집중해 주는 것이 고마워서 또 아이디어를 짜내곤 합니다. 어쨌든 학교가 메인인데 서브로 밀려난 느낌.. 그래서 점점 학교에서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이 적어지는 느낌...


솔선수범하고, 주변 친구들의 어려움을 잘 보살피고     

→ 최근 들어 가장 적게 쓰이는 단어가 뭘까? 고민하다 떠오른 것이 솔선수범입니다. 이건 나의 에너지를 상대방을 위해 나눠 쓰는 개념이기에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간혹 이런 아름다운 아이가 있지요. 자녀가 이런 문구를 받아왔다면 일단 아주 많이 칭찬해 주세요. 주변을 살피는 시야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자질이 아닙니다. 분명 훌륭한 자질이지만 과하지 않게 조절하는 것도 함께 지도해 주시면 좋습니다. 도움이 진짜 필요한 친구도 있고 친구의 도움에 기대어 편히 가려는 친구도 있고, 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내가 앞장서서 도와야 하는 건 아닙니다. 기부도 내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나누는 것이기에 솔선수범도 자신을 희생하는 영역까지 커지지 않게 잘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썼는데 개인적인 의견에 그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점, 21년을 마무리하고 22년 차에 접어드는 초등교사 입장에서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저의 솔직한 의견을 풀어보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부모님 면전에서 차마못한 이야기들, 통지표 1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