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솔 Jul 07. 2023

작별과는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비평문

1.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은 성근 눈이 내리는 한 벌판 위에 선 주인공 ‘경하’의 꿈속 장면으로 시작된다. 벌판에 심어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은 마치 누군가의 묘비처럼 보이고,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는 사이 어느 순간 발아래로 물이 차오른다. 경하는 무덤들이 모두 바다에 쓸려 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어쩌지 못하는 채로 꿈에서 깨어난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물었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야? (10쪽)


이후, 친구 '인선'과 이 꿈을 모티브로 한 작업을 함께 하기로 하지만 좀처럼 진행되지 않은 채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한편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하다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인선은 목공 작업 도중 손가락이 절단돼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경하에게 제주도에 홀로 남겨진 앵무새 '아마'를 구해 달라고 부탁한다. 경하는 마지못해 제주도로 향하지만, 어둠, 혹한, 폭설과 끔찍한 두통 속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 든다.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112쪽)


경하는 가까스로 인선의 집에 도착하지만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은 뒤였다. 구멍 숭숭 뚫린 뼈와 깃털처럼 가벼운 몸. 꼿꼿하게 횃대에 앉아 있다가도 한순간 맥없이 고꾸라지는 연약한 존재들. 앵무새 아미와 아마는 인선과 그의 어머니 '정심'을 닮았다. 꿈일까, 환상일까. 다음 날, 잠에서 깬 경하는 아마와 인선을 본다. 꿈과 생시가 불분명하게 뒤섞인 시간 어디쯤에서, 인선이 들려주는 어머니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열세 살 소녀 강정심. 제주 4.3 항쟁 당시 온 가족을 잃고, 군경에게 잡혀간 오빠의 행적과 유해를 찾아 헤맨다. 정심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통해 경하와 인선은 어머니 강정심의 여생을 더듬어 간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84쪽)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의 상흔을 응시하고 치유를 모색한다. 작가는 "제노사이드와 같은 일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무서운 질문으로 현재와 이어져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절멸과 혐오의 메커니즘을 더욱 끈질기게 들여다보는 것에 성공한다.



2. 그 후 남겨진 사람들


경하가 제주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1부는 작가가 해당 소설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듯하다. 책의 1부를 읽는 내내 한강이 무엇을 밟고 어떤 발자국을 남기며 이 소설에 도착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의 말을 읽는 듯했다고 말하면 조금 쉬울까. 결국 경하의 여정은 작가가 진실에 가 닿는 유일한 방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폭설을 뚫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경하는 몰아치는 폭설 속에서 끝내 살아남아 정심의 기억과 마주한다. 이는 인선에 대한 회고와, 인선의 환영을 통해서이다. 작가 한강은 남은, 혹은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하, 인선, 정심을 통해 풀어낸다.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281쪽)


온 가족을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십오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와, 부모와 동생을 한 날 한 시에 잃고 오빠마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채로 언니와 둘이 남겨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와 함께, 학살 이후의 시간을 살아내며 오빠의 행적을 찾는 일에 수십 년을 바쳐 끝까지 포기하기를 택하지 않았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고요한 싸움이—폭설로 고립된 외딴집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촛불 아래 조용히, 그러나 충분히 소란하게—떠오른다. 빛과 어둠 사이를 가르며 영원처럼 느리게 하강하는 수천수만의 무심한 눈송이들 속에서, 이곳에 있지 않은 사람을 간절히 생각하는 마음—사랑—이 그렇게 정심에게서 인선에게로, 인선에게서 경하에게로 스며든다.


이쯤에서 '남은'과 '남겨진'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남은' 사람에게 남겨진 건 무엇일까? 떠나지 않고 남겠다는 결심의 용기, 능동적인 결정과 그에 대한 책임감. 그렇다면 '남겨진' 사람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남겨진 자로서 풀어야 할 숙제, 그에 대한 책임감. 죄책감과 슬픔. 작품은 경하와 인선을, 인선과 정심을 거쳐 우리를 마침내 수만 조각의 뼈들 앞으로 인도한다. 희생자와 생존자, 증언자, 청자 혹은 작가, 그리고 독자가 서로 겹쳐지며 이어지고, 그럼으로써 4.3과 현재가, 죽음과 삶이 이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연결과 연대를 말하고 있다.



3. 미완의 죽음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225쪽)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으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죽음이 아닌 미완의 죽음으로 남아있으니, 그것을 완전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남겨진' 자들에게 남은 숙제이며, 책임이다. 죽은 채 실종된 사람들의 유해를 찾는 것은 미완의 죽음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실종자들의 미완성된 죽음이 온전해질 때, 남겨진 사람들의 삶 역시 다시 흘러간다. 결국 인선의 어머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짓지 못하고 제대로 된 삶을 시작도 못해본 채 분열 속에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의 삶에는 저항도 절규도 없다. 삶과의 화해도 없다. 내면화된 고통을 오직 지극한 사랑으로 견뎌낼 뿐이다. 폭력과 비극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하지 않겠다는 침묵의 의지. 작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겠다는 결연함.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 사랑과 고통도 하나임을 보여준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일평생 그랬던 것처럼, 인선은 어머니의 삶이 자신에게 스며오는 것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사랑을 외면하지 못한다. 경하 또한 인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으로 겹쳐지는 것에 힘겨워하면서도 그 마음을 내치지 못한다. “이 눈보라를 뚫고 오늘밤 그녀의 집으로 갈 만큼 그 새를 사랑하지 않는다”(88쪽)고,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152쪽)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그 사랑에 손을 내밀어 기어이 고통을 택하는 것이, 그것만이 오직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길이라고 소설은 말하는지도 모른다. 경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초 한 대를 들고, 손가락으로 비극적인 과거를 하나하나 짚어가지만 소설은 끝내 '생명'과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은 마치 환부에 바늘을 찔러 넣듯 고통스럽다. 껴안기 어려운 것을 껴안을 땐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이야말로 죽음 대신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애도와 사랑을 끝내지 않고 모든 것을 끝까지 안고 가겠다는 일종의 의지이다.



4. 삶을 위한 용서


한강은 소설 속 눈송이처럼 스러져 간 사람들의 넋과 혼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의 소설은 고요한 동시에 소란하다. 마치 눈송이가 떨어지는 형상과 같다. 고요히 낙하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눈의 결정들처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내내 귀에서 눈 밟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절대로 쉽게 읽을 수 없다. 작가의 호흡을 한숨도 놓쳐서는 안 되며, 사력을 다해 끝까지 '경하의 손가락'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렇지만 한강은 충분히 독자의 안에서 집요함을 끌어낸다.


저 사람이 내 인생을 더 이상 어둡게 채색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78쪽)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는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형이상학적 용서를 한다.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전적으로 피해자를 위해서이다. 더는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원한에 지배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죄를 용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삶을 위한 용서'가, 더 이상 수식어가 붙지 않는 진정한 '용서'로 남을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설령 그것이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러운 사진(32 쪽)'일지라도, 인선의 환부에 꽂히는 바늘일지라도. 우리는 있는 힘껏 들여다보며 함께 고통스러워해야 한다. 고통을 들여다보며 작별하지 않기를. 그럼으로써 종국에는 작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