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과 독자의 기록
<순이 삼촌, 현기영 소설집, 창비>
p.86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 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 순이삼촌(1978), 현기영 소설집, 창비 -
읽고 싶은 책들을 향한 마음을, 실제로 책을 읽는 시간이 따라가지 못하고, 아이들이 잠든 밤마다 읽던 책들의 시간을, 기록하는 손이 따라가지 못한다. 엄마의 시간은 조각 투성이라서... 그 어느 틈엔가 책 읽는 시간도 들어가고, 읽었던 책을 기록하는 시간도 들어간다.
9월의 밤엔, 틈틈이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을 읽었다. 고백하건대 ‘4월에 읽고 싶어. 아니, 읽어야지.’ 하고 다짐했던 책을 이제야 마주했다.
누가 4.3 사건을 제주만의 이야기라고 했던가. 제주 4.3은 우리의 역사다. 제주만의 이야기가 될 뻔했던, 우리가 몰랐을 역사 뒷면의 한 페이지가 될 뻔했던 이야기가 <순이 삼촌>이 되어 전해진다. 문학의 힘을 느끼고, 여태껏 아무도 꺼내지 않던 이야기를 문학 작품으로 풀어낸 작가의 사명을 느낀다. 여기에 독자의 책임감을 더해, <순이 삼촌>을 읽었던 어젯밤의 시간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202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