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척하는 문화재(국가유산)에 첫눈에 반함
나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다. 꽂히면 꼭 디자인을 해서 세상에 내놓아봐야 하는 것. 제품 하나를 출시하는 데에는 시장성, 잠재고객 등을 찾아보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코래픽(KORAPHIC)은 일단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기 위해 만든 브랜드기에 아직은 ‘내가 매력을 느꼈는지’가 실행에 옮기는 가장 큰 기준이 되고 있다.
서론이 길었던 이유는 2년 전쯤 제품의 샘플을 볼 새도 없이 급하게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를 열었다가 실패했던 이야기로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3월 경이었나? 우연히 인터넷에서 묘한 비석의 사진을 보게 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비석의 위화감과 생경함에 가슴이 떨려 열심히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에 놀란 지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자연석 그대로 만들어진 비석이라는 점. 광개토대왕릉비처럼 잘 정형된 비석이 아니라 자연석을 그대로 세운 것 같은데 세워진 지 매우 오래된 느낌도 났다.
둘째, 오래되어 보이는 자연석 비석에 적힌 ‘한글’. 이것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레트로 감성으로 요즘 사람들이 만든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제대로인 느낌이라 위화감이 들었다. 이벤트성으로 만들기에는 비석의 규모가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딱 한글 네 글자만 적힌 것이 너무 특이했다. 요즘 이런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면 비석보다는 현수막을 주로 사용할 것 같다. 그런데 굳이 비석으로만든다면 이 네 글자만 새기기보다는 표어 형식으로 적고 누가 세웠는지, 해당 지역 또는 관할 단체의 로고 등등을 더 표기했을 것 같다.
셋째, 적힌 한글의 생김새가 너무 이상하다. 디자이너 관점에서 봤을 때 한글의 폰트가 너무 특이했다. Regular나 Medium에 가까운, 두껍지 않은 폰트인데 강조를 위해서는 BOLD나 BLACK 같은 옵션을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폰트의 두께 뿐만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옆으로 흘러가는 것이 마치 잘못 적은 글씨처럼 보여, 요즘 디자인의 결과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넷째, 가장 생경하게 위화감이 느껴진... 위화감이라는 표현도 상당히 정제된 표현인데, 인지부조화. 속된 표현으로 ‘띠용~!’을 느낀 포인트는 저 ‘됴심’이라는 표현이었다. 저렇게 무거운 비석을 세워놓고 → 딱 네 글자만 새겼으면서 → 잘 안 보이는 얇은 글씨체로 새겨놨는데 → 또 명시성이 높은 시뻘건 칠을 하고 → 갑자기 귀여운 척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화살표로 넘어는 모든 과정이 인지부조화를 느끼게 했다. 그런데 그 지점들이 왜 그런지 너무 매력적이었다.
역시나 조사해 보니 ‘MZ세대에게 귀여운 척하는 문화재’로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있던 ‘산불됴심’ 비석의 정식명칭은 ‘조령산불됴심표석’으로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비석의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인 ‘됴심’은 옛 표현이다. '됴심→죠심'은 18세기 이후의 구개음화, '죠심→조심'은 19세기 이후 단모음화 현상으로 변화했기에 이 비석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후인 조선시대 영·정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고어로 된 가장 오래되면서도 유일한 순수한글비이며 한국 최초의 자연보호 표석의 의미 역시 지니고 있다.
알면 알수록 아주 어마어마한 비석이잖아?
당시 새로운 문화상품을 선보이는 과정이, ‘흥미로운 문화재를 발견한다 → 내 스타일에 맞게 리디자인(정리)한다 → 뱃지로 만든다 →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를 연다’가 기본 흐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뱃지로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도 뱃지만 만드는 것이 좀 약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터넷에서 산불됴심 비석 사진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고 지나가는 것과, 그 모양의 뱃지를 직접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 산불 말고도 조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스스로 적게끔 하자!
2. 다른 문화재에서 산불조심, 불조심과 관련된 것들을 모아서 세트로 기획하자.
3. ‘됴심’이라는 타이포그라피만 가지고 무언가를 더 디자인해 보자.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녹아든 굿즈들을 만드는 것을 기획했다.
한 프로젝트 안에 3가지나 되는 목표가 충돌하는 셈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이 없어 뱃지 실물이 나오지 않은 상태로 이미지 목업(상상도)만 가지고 프로젝트를 열 수밖에 없었다. 혼자 하는 프로젝트기에 사실 언제 오픈해도 상관이 없는데, 시간이 부족했던 이유는 식목일에 맞추어 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샘플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음에도 3가지 방향이 충돌하는 그런 프로젝트를 급하게 열었으니 잘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프로젝트 제목이 무려 ‘됴심됴심 문경새재 산불됴심 뱃지와 스티커팩, 박스테이프’...) 그렇게 텀블벅 펀딩은 실패하고 말았다. 펀딩 중간에 제작한 산불됴심 뱃지를 2022년에, 그리고 2023년에는 키링을 추가로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 오픈 없이 인터넷 판매페이지에 올려놓고는 까먹고 있었다. 가끔 산악회나 동호회에서 단체구매 해주셨던 것 같다. 경기도청 산림녹지과에서도 구매를 해 주셨다.
2년에 걸친 독도 관련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묶어 독도 기념품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뒤, 어느 평화로운 날 산불됴심 뱃지와 키링을 포장하고 있는데 불현듯 궁금증 해졌다. 산불됴심 비석이 있는 문경시에도 관광기념품 공모전이 있지 않을까?
코래픽(KORAPHIC)에서 디자인을 전개하는 방식이 문화재 하나, 문양 하나에 영감을 받아 여러 가지를 만드는 편이라, 다양한 관광지를 소개하면 좋을 ‘관광기념품 공모전’에는 잘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늘 스스로 하고 있었다. 작은 것에 집착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뱃지와 키링이 만들어져 있는데 도전 안 해볼 이유가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펀딩 때 실물화 하지 못했던 박스테이프와 마스킹테이프를 꼭 실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생산해 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뱃지, 키링의 배경지를 리디자인하고, 마스팅테이프, 박스테이프를 추가해 총 네 가지 아이템을 출품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한 프로젝트에서 네 가지 아이템이나 만들게 되니 이번에는 기획 의도 자체를 단순하게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감히 디자인으로 얄팍하게 뭘 가르친다거나, 이 비석의 요소들을 활용해서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데에까지 가지 않고, 내가 느낀 이 문화재의 매력을 다른 분들도 느껴보았으면 해서 내가 흥미를 가지고 찾아봤던 비석의 매력 포인트들을 디자인으로 잘 나열해서 전달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2년 전과는 다르게 기획 의도를 ‘이 비석을 잘 정리해서 알리자’라고 정하자 그다음부터는 디자인이 술술 풀렸던 것 같다.
펀딩을 위한 기획으로 디자인할 때에는 다양한 방향이 상충했기에, 이도 저도 아니게 흘러갔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콘셉트가 너무 많아 콘셉트가 없는 프로젝트였었다. 이번에는 ‘산불됴심 비석을 알리자’라는 일관된 콘셉트가 있어서 비석을 설명하는 이미지와 표, 그리고 문단을 배치하는 디자인으로 정리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신문지나 잡지의 레이아웃이 레퍼런스가 되었다. 주로 옛 신문지를 연상하며 작업했기에 한 가지 컬러로만 디자인하고, 비석을 망점 이미지로 변환했다. 비석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인 ‘됴심’의 변화과정인 구개음화와 단모음화에 따른 변화를 정리하는 문단, 비석에 대한 기본적인 명제표, 이에 대한 한글과 영어로 설명하는 문단을 만들어 배치하면서 디자인을 전개했다. 그리고 비교적 단순한 뱃지와 키링의 배경지 디자인에 비해 가로로 길면서도 반복되는 테이프의 특성상 됴심(=주의)을 상징하는 다양한 주의 아이콘(caution sign icons)들을 활용하였다. 아무래도 박스테이프는 말 그대로 박스 포장에 사용될 것이기에 산불됴심의 메시지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어색하겠다 싶어 다양한 아이콘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약간의 꾸밈을 더했다.
그리고 산불됴심의 빨간색 글씨가 일상생활에서 너무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글자색을 하얀색으로 바꾼 버전을 만들었었는데 이에 맞춰 뱃지도 2종류, 키링도 2종류, 박스테이프도 2종류, 디자인하다 보니 마스킹테이프는 4종류... 가 되었고 각 제품의 패키지도 만들어야 했기에 하다 보니 생각보다 큰(개수가 많아지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콘셉트 와 디자인 기조를 단순하게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엉망진창 프로젝트가 (다시) 될 뻔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제출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은 ‘됴심됴심 산불됴심 꾸러미’로 정했다. ‘됴심’이라는 표현을 강조하며 반복함으로써 요즘 세대에게는 귀여움이 먼저 느껴지는 문화재임을 알리며, 세트 대신 ‘꾸러미’라는 표현으로 전통을 콘셉트로 하는 브랜드라는 점을 나타내고 싶었다. 이렇게 디자인과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서 좀 기진맥진했지만 어쩐지 직접 제출하고 싶어 경북 문경까지 다녀왔다. 우여곡절 끝에 제출을 마쳤는데 수상여부와 상관없이 돌아오는 길에 매우 뿌듯함을 느꼈다.
결과 발표일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제출하고는 까먹고 있었는데 무려 은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시상식이 열려 참가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문경을 다시 방문하여 다른 수상작들을 직접 보며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수상소감을 말씀드릴 기회도 주어져, 산불됴심 비석이 MZ세대들에게 귀여운 척하는 문화유산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왔다.
공모전 수상 만으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았지만, 디자이너이자 대표로서 더 좋았던 일은 수상 이후 각각 문경시와 문경관광진흥공단에 대량 납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샘플만 생산해 본 박스테이프의 본품 생산을 경험 할 수 있었고, 디자인이 변경된 키링의 배경지 역시 제대로 생산해 볼 수 있었다. 신기하게 샘플 볼 때랑 같은 파일로 제작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할 때마다 특이점이 생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이 역시 너무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납품한 ‘됴심됴심 산불됴심 박스테이프’는 문경시에 납품해 대구 EXCO에서 개최된 ‘2024 대한민국 캠핑대전’에서 문경시 홍보부스에서 활용되었고, 문경관광진흥공단에 납품한 ‘됴심됴심 산불됴심 키링’은 2024 문경사과축제의 홍보용 굿즈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하니 공모전 수상에 이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이렇게 코래픽(KORAPHIC)은 지자체에 첫 납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전 실패했던 펀딩 프로젝트로만 남아있었을 수도 있었는데 이를 되살려 공모전 수상까지 하게 되어 너무 큰 의미가 있던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둔해도 꾸준히 앞으로 가기는 가는 디자이너구나 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2년 전의 나는 디자인 실력도, 기획능력도 일천하였다면 시간이 지나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라도 비교적 정리할 수 있게 발전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경시의 아름답고 다양한 관광지를 모두 다루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문화재(산불됴심 비석) 딱 하나에만 집착한 프로젝트라 제출 자체에만 의의를 두었는데 이러한 프로젝트라도 공모전 주최 측에서 관심 있게 봐주신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2년이 넘도록 이 산불됴심 비석의 매력에 계속 빠져있는 것을 보면 지금 코래픽(KORAPHIC)이라는 디자인 브랜드를 통해 하는 일들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맞다는 작은 확신을 해보게 되었다.
* 2024년 5월 17일 부로,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래 60년 만에 문화재 명칭 및 분류체계 전면 개선안을 확정하고, 문화재(財)라는 명칭이 유산(遺産)으로 변경(통칭은 ‘국가유산')되었으나, 2년 전 프로젝트 시작 시점의 표현인 문화재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