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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 Feb 29. 2024

어쩐지 출발이 좋더니만

- 버스 타고 혼자 먼저 간 게 무슨 대수라고?

정말 끝도 없다. 사춘기라는 터널. 이 터널의 끝은 언제쯤이면 보이는 걸까? 어떤 이는 "금방 다 지나 가. 조금만 기다려."라고 했고, 다른 이는 "길면 고2 때까지도 갈 수 있어요."라고도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는 어느 쪽에 속할까? 아무래도 고1 입학식을 코앞에 둔 아들은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 쉽게 끝낼 수 없는 걸까? 그놈의 사춘기.

'사춘기(puberty)'는 '신체가 성장함에 따라 성적 기능이 활발해지고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춘기가 무슨 청소년기의 특권인가. 어른들의 덕담이든 잔소리든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짜증부터 내는 게 당연하단 말인가. 마치 사춘기는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게 되는 당연한 현상인 듯 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이들의 반항심을 부추기는 건 아닐까. 괜히 딴지를 걸어본다.


오늘은 모레부터 시작되는 삼일절 연휴가 지나면 고교 입학식을 거쳐 정식 고등학생이 되는 집돌이 아들을 위해 혼자 다녀와도 될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함께 도심지 상가 밀집 구역에 다녀왔다. 국내 5대 은행이 멀지 않은 곳에 몰려 있어 평소 미뤄두었던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어제 간만에 학원 숙제를 다 해두었다는 아들이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할 일을 마친 아들에게 '나간 김에 외식'이라는 보상을 주고 싶어서 동행을 제안했다. 아들이 흔쾌히 따라나서길래 좋은 마음으로 출발했다. 언제나처럼 뚜벅뚜벅 대중교통으로.


실질적 월말은 내일이지만 오늘은 방문하는 은행들마다 기본 30분 이상씩 대기해야 했다. 사실 IT강국인 대한민국 수도권에서 40대인 내가 은행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는 있겠으나 어쩌겠는가. 통장 이월 재발행 업무와 미성년자 아들의 체크카드 신청을 위해서는 필히 영업점을 방문해야 하는 것을. 그렇게 S은행에서 30분 이상을 대기하고 또 그 반인 15분 이상의 시간을 써서 필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나니 이미 오후 1시가 살짝 넘었다. 학원 수업 시작 시간인 저녁 6시까지는 아직 시간은 넉넉했지만 도보로 이동 가능한 지역이 아니고, 우리 동네를 오가는 버스는 기본 30~40분 간격으로 운행하니 서둘러서 점심을 먹고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도심지라 다양한 메뉴의 식당들이 즐비했다. 그중 평소 아이가 좋아하는 '부대찌개'를 파는 식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래는 유명 프랜차이즈 대표의 브랜드 중 하나인 멸치국숫집에 가려고 했었는데 그새 또 없어졌다. 요즘 상가들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돌아서면 없어진다. 경제 위기에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들이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고 가게 문 앞에 쓰여있는 '부대찌개 8,000원'이라는 문구를 보니 가격까지 나쁘지 않아 들어갔다. 그러나 자리를 잡고 앉아 뒤쪽 메뉴판을 다시 보니 숫자 8이 있어야 할 자리에 종이를 덧대어 '9'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남편이 있었으면 분명 "뭐야, 밖에는 8천 원이라더니 9천 원이야? 그냥 나갈까?" 하며 기껏 자리 잡고 앉았는데 박차고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나는 남편의 그런 행동이 진저리 나게 싫었으므로 그냥 바로 아이에게 "부대찌개?"라고 한번 더 의사를 확인한 뒤 "사장님, 여기 송탄부대찌개 2인분이요."라고 주문했다. 대신 '라면사리 셀프 무한리필'이라는 안내문에 위안을 삼으며. 자라면서 시어머니, 남편으로 이어져 내려온 '공짜 밝히기'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도 기어이 라면사리 하나는 더 먹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따지면 2인분에 기본으로 라면사리가 제공되고 추가 라면사리까지 무한리필이니, 1인분에 9,000원인 부대찌개가 가성비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이어트 중인 나도 폭식하는 아이의 폭주를 두고만 볼 수는 없어 덩달아 라면사리를 조금은 넉넉히 먹었다. 전체 라면사리 양의 5분의 2는 먹은 것 같았다. 다행히 나의 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원래 그 정도 양은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는 위였기에.


식후 바로 마시는 커피는 좋지 않다기에 은행 한 군데를 더 들러 업무를 마저 보고 나서 카페에 들렀다. 사실 바로 집에 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금융업무 처리를 위해 우리 둘의 교통비와 식사비까지 들여야 하는 슬기롭기는커녕 비효율적인 경제활동을 하였으니 프랜차이즈 카페까지 들르는 건 사치였다. 그러나 장엄하게 들고 나온 나의 글쓰기 습관을 위한 사랑하는 태블릿 PC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그냥 다시 들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T카페에 들러 아들은 언제나처럼 휴대폰에 얼굴을 묻고 나는 누가 볼세라 짜잔~하고 S사의 태블릿 PC를 꺼내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진행하는 '카톡에 백일동안 매일 글쓰기' 챌린지를 실천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자 바로 옆 테이블에서 중년의 여인 두 명에 뒤늦게 온 여인 한 명이 합류하여 도란도란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길지 않은 분량의 글을 써서 단체채팅방에 올려 인증을 하고는 예정한 시간보다 조금 시간이 남아 밀린 서평 도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타닥타닥 키보드판을 두드릴 땐 별로 들리지 않던 옆 테이블 여인들의 대화내용이 책을 읽으려니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그녀들의 시선이 학원이나 집에 있어야 할 나의 맞은편에서 휴대폰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아들에게 미쳤으리라. 처음에는 부동산 얘기로 시작하더니 갑자기 주변 고등학교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구도심인 구에 속하고 더욱이 우리 모자가 사는 지역은 그 구에서도 원도심지다. 그런 우리 동네를 들먹이며 낙후되었단 얘기를 적나라하게 하고 있었다.

"언니!(뒤늦게 합류한 연장자인듯한 여인) 그럼 거기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거기는 무슨 동이예요? 아~OO구구나."

"응, 거기는 OO구 시작되는 지점이야. XX리지 뭐. 그래서 읍사무소가 차로 30분이나 걸리더라니까."

"맞아요. 그 동네에는 고등학교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 동네 사는 애들 중에 H고등학교 떨어진 애들은 엄마가 만날 태워다 주니까 애들이 길도 잘 못 찾고 바보 같더라고요."

여기까지 듣는데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나도 서울 역세권에 살다가 내려오니 한 번씩 볼 일 보러 도심지 나갈 때마다 답답하고 짜증 나는데, 막상 우리 동네 흉을 보고 있는 꼴이라니 확 고개 들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그래요. 나 그 동네 사는데 뭐 보태준 거 있어요? 그 동네도 다 사람 사는 곳이거든요?"라고. 그러나 당연히 할 수 없었다. 나만 그 카페에서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이상한 아줌마가 되어 있을 테니. 그리고 뒷말을 하겠지.

'쯧쯧... 그 시골 동네 사는구나~어쩐지 촌스럽더라.'라고.


그래서 슬슬 일어날까 하던 차에 마침 읽고 있던 책의 한 장이 끝나서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그런데 아들에게 아까 옆 테이블 여인들의 대화를 언급하며 '우리 동네 출신 아이들 바보 같다더라'라고 했더니, 아들도 그래서 처음엔 그냥 폰만 보다가 이어폰 낀 거였다며 기분이 별로인 듯 보였다. 그런데 뭐라고 내가 한마디 덧붙이자 아들이 갑자기 또 욱하며 짜증을 내더니 혼자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제 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더 큰 아들의 보폭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좀 천천히 가자고,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더니 뿌리치고는 전보다 더 빨리 걷는 것이 아닌가. 나도 더는 함께 걷기를 포기하고 아들이 손에 든 에코백 속에 나에게 필요한 물품이 있어 그 에코백을 나에게 달라고 하였는데 못 들은 척 기어이 혼자 앞서 걸었다. 내 마음도 모르고 또 혼자 욱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들 녀석에게 나도 화가 나서 교차로 신호등에 멈춰 선 아들을 보고 다른 방향 횡단보도에 섰다. 아들이 서 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먼저 초록불로 바뀌었고 마침 최단시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는 광역버스가 막 정류장에 들어서고 있었는지 열심히 뛰어 그 버스에 올라탄 것 같았다. 분명 난 건너는 것도 못 보았는데, 아마 그 버스를 놓치면 최소 30분 이상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아이도 알고 있었다. 내가 서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바뀌어 길을 거의 다 건넜는데 바로 내 쪽으로 회전하는 우리 동네에 가는 그 광역버스를 보았다. 얼른 버스정류장을 보니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버스를 혼자 먼저 탄 것이다. 분명 나를 보며 통쾌했겠지.

아이의 배신으로 나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방금 떠난 버스 다음엔 최소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으므로 차선 경로인 일반버스를 타기 위한 노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눈앞의 버스를 탔다. 마침 신호대기가 길어 일반버스는 최대한 많은 손님을 태우려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술 취한 듯한 사람이 횡단보도에서 자신이 건너는 도중에 우회전하는 차량을 향해 마치 자해공갈단처럼 시비를 거는 모습을 보니 나도 얼른 그냥 그 버스에 올라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서 있는 정류장 쪽으로 그 취객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괜한 시빗거리가 되기 싫었다.


정말 그 상황이 화가 나서 아이와 오늘 집에 가면 한마디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죽는 일이 아니면 학원에 보내야 하는 대한민국 학부모인 나는 그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늦지 말고 학원 가라는 당부의 *톡을 먼저 보냈다. 이러니 결국 만날 나는 아이와의 기싸움에서 지는 거다. 아이는 선생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30분 늦게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알겠다고 하고 집에 최대한 빨리 가는 경로를 휴대폰의 대중교통 앱으로 열심히 검색해서 그대로 진행했는데 내가 탄 일반버스는 어찌나 느리게 가던지 타들어가는 내 속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가 아들과 엇갈렸던 그 광역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 사이 또 내가 타야 할 그 버스는 야속하게도 떠나버렸다. 오늘만은 내게 그 버스는 광역버스가 아니고 광속버스였다. 조금만 천천히 운행했으면 내가 일반버스에서 내려 바로 환승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그 자리에 있을 걸. 화장실이 급하기도 했는데 평소 가던 그 정류장 근처 대학의 치과병원을 이용하면 되었을 걸. 괜히 좀 더 빨리 귀가하려다 돈 버려 시간 버려 낭비만 했다. 심신이 지쳤다. 분노의 감정만 더욱 활활 타올랐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한 나는 아이가 말한 늦춰졌다는 수업 시작 시간도 몇 분이나 지나서 집에 도착했기에 불 꺼진 방에 당연히 아이가 학원에 가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의 현관문 여는 소리에 현관 앞 센서등이 켜지고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너무 화가 나서 현관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지금 시간이 몇 신줄 알아? 당연히 학원 갔을 줄 알았더니 자고 있어? 빨리 안 가?"

그리고는 아이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정말 예전 같으면 또 등짝스매싱을 날렸겠지만 이제는 사춘기고, 얼마 전 내가 또 참다 참다 이성을 잃었던 그 순간 나를 침대에 메다 꽂는 아들의 위력을 느꼈기에 물리력은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는 집을 나섰다.

학원에 다녀와서 또 똥 씹은 얼굴을 하고 들어와 "다녀왔습니다." 하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그때까지도 눈길을 주기는 싫었다. 아들이 "엄마, 내 맘 알죠?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이번엔 바로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테다. 그래서 내가 원래 계획한 대로 운동도 할 겸 야간개관으로 도서관이 밤 10시까지 운영하므로 대출한 도서들을 반납하러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아들이 또 말을 걸었다. "어디 가세요?"라고. 어쩔 수 없이 난 또 입을 열었다. "도서관 갈 거야. 엄마가 빌린 책 오늘까지 반납 안 하면 연체야." 그랬더니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잠깐 망설였다. 계속 화난 모드를 할 것인지 아이가 이렇게까지 화해하려고 제 딴엔 손을 내미는데 뿌리치기만 할 것인지. 어쩌겠는가. 또 엄마인 내가 받아줘야지. "알았어. 그럼 얼른 밥 먹고 다시 옷 갈아입어."


도서관에 가서 또 읽지도 않을 책을 우리 모자는 잔뜩 빌려왔다. 오늘이 무한대출기간이라 1인당 평소 7권인 대출권수가 2배인 14권까지 빌릴 수 있는 주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왔는데 또 수학 학원 다니기 싫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그 징징징 소리가 듣기 싫어 이제 정말 나도 더 이상 돈은 돈대로 버리면서 아이의 끊임없는 투덜거림도 듣기 싫어서 이번 돈 낸 기간까지만 채우고 그만두라고 했다. 대신 아빠한테도 정확하게 네 의사 밝히라고 당부했다. 그러다가 또 뭐가 화났는지 방문을 쾅하고 닫고 들어가더니 "아휴~정말"하며 뭐라고 투덜투덜 푸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신경은 또 곤두섰고 아이만 행복한 저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나는 이렇게 화나는데 왜 아이가 행복해야 하는지 억울했다. 화가 났지만 밤이라 화도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져 얼른 헤드셋을 쓰고 귀를 가렸다. 그리고는 듣다가 중단한 오디오 북을 재생했다. 얼마 후 아이가 비염약을 저녁에 먹지 않은 게 생각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약 먹어." 소리를 들은 아이가 약만 먹고 또 제 방으로 들어갔다.


아~ 나 저 아이와 어떻게 남은 고등학생 시절을 살아야 하는 거지? 왜 내가 저런 아이를 낳았을까? 나 저 아이 너무 꼴 보기 싫은데 어쩌지?...

나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난 나쁜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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