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순간, 모든 날이 글로 채워진 삶을 돌아보는 노년의 작가
그동안 내가 김훈 작가를 제대로 알긴 한 걸까? 그의 명성에 출간한 여러 책들을 당연하게 사 모았다. 언젠가 ‘작가별 탐독하기’ 시간을 만들어 한꺼번에 읽어보리라 다짐하며 집안 책장에 한 자리를 내주었다. 세월의 깊이만큼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의 무게를 견디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품들. 그러던 중 신작 산문집 <<허송세월>>이 2024년 6월 20일에 출간되었다. 이후 7월 10일에 이미 초판 6쇄를 찍었다.
우선 ‘김훈’이라는 명성과 70대 중반인 노작가의 회한이 느껴지는 제목은 대중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으리라. 게다가 그의 대부분 출간작 표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미색-흔히들 ‘베이지색’이라 부르는-바탕이다. 작가 본인이 드로잉했다는 ‘정자에 앉아 자연에 시선을 드리운 채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표지 그림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표지를 열고 들어가면 상징과도 같은 ‘원고지’ 속표지가 등장한다. 책날개에도 거창한 수식어 대신 대표 작품 3종 정도만 언급되어 있다.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평소 그의 성정답다.
서문과 맺음말 대신, ‘앞에’와 ‘뒤에’라고 표현한 것도 신박하다. ‘앞에’ 글에서는 친구들의 부고가 하나둘씩 늘어가는 것에 서글퍼하며, 자신도 건강 이상으로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를 끊고 술도 극도로 자제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총 3부로 나누어, 각각 자연 예찬, 좋은 글의 요건, 시대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1부-새를 기다리며
코로나를 언급하고 있는 걸로 봐서 이미 전작 <<칼의 노래>>로 100만 부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 작가임에도 소설도 아닌 산문집을 올해에서야 출간함으로써 최소 3년 이상 원고를 열심히 매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장의 두 번째 꼭지가 바로 ‘허송세월’이란 제목으로 쓰였다. 수미상관을 이루듯 햇볕에 대한 예찬은 본문 3장의 마지막 꼭지 ‘인생의 냄새’에서도 등장한다. 그의 햇볕 사랑은 시간의 흐름으로까지 사고가 확장된다. 그의 뇌 총량이 문득 궁금해졌다.
“시간을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라고 억지로 말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말로부터 소외되지만,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 수 있고, 한 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성명을 느낄 수 있다.”(본문 p.48) 내게 ‘산문이 이 정도라고?’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의 표현법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2부-글과 밥
자신이 읽은 책 이야기를 소화해 들려주는 이번 편은 서평쓰기의 또다른 예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또한 나의 글쓰기 커뮤니티 리더님께서도 늘상 강조하는 조사의 유용함, 형용사•부사의 쓸모없음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따로 인쇄해두고 글 쓸 때마다 원칙으로 삼아야 할 정도로 유용했다. 먼저,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나 한국어로 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늘 조사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머뭇거린다. 읽을 때 나는 늘 조사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머뭇거린다. ‘은, 는, 이, 가, 을, 에...’ 따위의 한국어 조사는 한 음절로, 생김새는 허름하지만 쓰임새는 넓고 깊다. 조사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고 단어에 지위를 부여해서 단어를 부린다. 한국어에서 단어들은 조사에 꿰어짐으로써 문장을 이루고 정돈된 메시지에 도달한다. 조사에 공을 들이지 않으면 한국어 문장을 쓸 수 없고 한국어 문장을 읽을 수 없다.”(본문 p.134)라고 하여 새삼 조사의 가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어지는 형용사와 부사의 남용을 놓고 ‘문장이 걸리적거려 꼴들이 역겹다’고 까지 표현한 그는, “형용사와 부사는 그 단어가 수식하려는 대상을 표현하지 않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적 정서나 감각과 선입관을 표현한다. 형용사가 문장의 술어가 아니라 수식어로 사용되었을 때 사물과 언어 간의 괴리는 더욱 두드러진다. ‘오늘은 춥다’라고 말하면 추움은 어느 정도 객관화되지만, ‘추운 오늘’이라고 말하면 ‘추움’은 말하는 자의 감각의 세계를 드러낼 뿐이고, ‘추위’라고 말하면 양쪽을 모두 추상화해서 개념의 세계로 넘어간다.”(본문 p.144)라고 설파한다.
그동안 무심코 썼던, 형용사를 관형형 어미인 ‘-ㄴ’을 붙여 명사 앞에 배치함으로써 내 감각 세계를 강조할 뿐인 허접한 글들이 떠오르며 김훈 작가의 눈에 내 글이 읽힐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 여겨졌다.
3부-푸르른 날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보다 『비글호의 항해기』를 즐겨 읽는다고 고백한 저자는 이승훈, 이벽을 비롯하여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수백 권의 책을 집필했다는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의 천주교 박해사건을 전한다. 이와 더불어 당대 현실의 야만성에 분노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는 밀서인 ‘황사영 백서’ 사건의 황사영, 천주교 세례까지 받은 도마 안중근까지 모두 자신의 마음속 영원한 청춘‘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어 ’내 새끼 지상주의‘를 꼬집으며, “남의 자식을 짓밟고 ’내 새끼‘를 밀어붙이는 이 고위층 갑질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저출산 정책에 수십 조를 퍼부어도 그 결과는 모두 헛것이다. 이미 헛것이 되었다.”(본문 p.252)고 탄식한다. 이에 동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천도교의 교리에 따라 어린이날을 창시한 방정환에 대해 ’한국 최초의 직업적 사회활동가‘라 명명하며 그의 행적을 기록한 뒤, “집집마다 ’아이고 내 새끼야‘를 외치는 날은 젊은 방정환이 설계한 어린이날이 아니다. 지금의 어린이날은 ’내 새끼의 날‘이다. 다들 제 자식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본문 p.256)고 재차 비판한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마치 신문 여러 면의 다채로운 기사를 작성하듯 사회면, 정치면의 여러 이슈인 저출산 정책, 빈곤 취약계층, 안전불감증과 위험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노동 현실, 정치가 사라진 한심한 정치권 등을 꼬집는다.
마지막 꼭지인 인생의 냄새에서는, 작가의 소년 시절 집집마다 마당 한구석에 푸세식 변소를 설치해 놓은 환경이어서 똥 냄새는 마을 전체에 자욱한 가장 일상적이고 지배적인 후각 환경이었다고 썼다. 그 와중에 똥 냄새만큼이나 작가에게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냄새였다는 ‘햇볕 냄새’에 대한 회상은, 절로 콧구멍을 하늘로 향하고 냄새를 맡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햇볕 속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저물어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네 머리통에서 햇볕 냄새가 난다.”라고 말했다. 햇볕에 냄새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엄마의 말을 믿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개천가나 무너진 옛 성터에 올라가서 놀 때 땅에서도 햇볕 냄새가 났다.(…중략) 내 소년 시절에 햇볕 냄새는 똥 냄새와 맞먹을 만큼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냄새였다. 똥 냄새는 밥과의 순환고리에 묶여서 생로병사의 무게로 장엄했고, 햇볕 냄새는 먹을 것이 모자라는 헛헛함이나 어른들의 부부싸움, 숙제 조사와 시험, 매 맞기와 벌서기의 고통이 없는 자유의 냄새였다.“(본문 p.322-323)
햇볕 냄새가 어떤지 구체적으로 감은 안 잡히지만, 의학적으로도 햇볕을 쬐면 우울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이 햇볕에 의해서 일부 합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햇볕을 충분히 쬐면 세로토닌의 수치가 높아지고, 우울감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수시로 우울에 빠지는 나는 필히 틈날 때마다 햇볕 좀 쬐야겠다. 그럼에도 자외선 노출은 피부 노화가 심각해진다고 하니 노출 부위는 가려야 할 텐데, 딜레마다.
그냥 산문, 즉 에세이를 이렇게 거룩하게 쓰면 나 같은 졸필가들은 대체 어떻게 에세이를 쓸 수 있단 말인가. 인상적인 제목 달기도, 강렬한 첫 문장도 뽑아낼 수 없는 많은 글쟁이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김훈 작가님!
분명 제목은 ‘허송세월’이라 붙였지만, 내 친정엄마와 동년배로 6‧25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격동의 한국사를 경험하며 한 세기를 넘어온 역사의 산증인이시다. 뜬금없이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서울 태생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남성과 가난한 집안 장녀로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지적인 허기를 독서로 채워 간 친정엄마가 대비되었다. 그간 김훈 작가에 대해 잘 몰랐던 것도 반성했다. 마치 김훈 작가를 잘 아는 듯 떠벌였던 지난날의 실언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작가가 말하는 허송세월과는 달리 말 그대로 젊은 날을 허송세월했던 나는 이제부터라도 치열해져야 한다. 다른 큰 일은 차치하고라도 글을 쓸 때 조사, 형용사, 부사의 쓰임을 제대로 알고 쓰는 일부터 실천해야겠다.
김훈 작가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독자분들은 이번 에세이를 통해 우선 그의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 가까이 접근시킨다’는 치밀한 문장들을 경험해 보시라. 나는 이 책 전에 그의 소설 『개』에서 이미 그의 문체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이 책의 서술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작품 속에서도 그의 다채로운 문체를 조만간 하나씩 뜯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