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와 코뿔소>, 노에미 슈나이더 글/골든 코스모스 그림
좀 똑똑해 보이는 어른을 만나면 나는 늘 가지고 다니는 내 작품 1호를 보여주며 시험을 해봤다. 정말로 그기 이해력이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이랬다.
"모자로군요."
그러면 나는 그와는 더 이상 보아뱀이나 원시림이나 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 트럼프 게임이나 골프, 정치나 넥타이 같은 주제를 이야기했다. 그러면 그는 분별 있는 사람을 만났다며 무척 흡족해했다.
루트비히와 아버지의 대화는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그림에 관한 대화와 비슷합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 화자는 수많은 어른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보아뱀 속에 들어간 코끼리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림은 그만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 산수, 문법에 관심을 가져보라'라고 충고할 뿐이었죠.
어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루트비히와 <어린 왕자>의 화자는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보는 것을 어른들은 보지 못하는 걸까요? 루트비히의 시선에서는 또렷하게 보이는 커다란 코뿔소가 대체 왜 아빠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죠? 그것은 아마 루트비히와 아빠가 '없다'의 정의를 다르게 내리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우리, 그러니까 대부분의 성인들은 보고 배운 과학적 테두리 안에서 존재의 유무를 판단합니다. 루트비히의 아빠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달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과학이죠.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 달이 지구 주위에 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그는 달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때 아빠에게 존재란 과학적으로 증명 속에 갇힌 것이 됩니다. 현대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직 어린 루트비히에게는 과학 너머의 세상이 존재합니다. 자신이 상상하는 것,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도 그에게는 모두 '있는' 것이죠.
이 그림책을 읽고서 우리는 '코뿔소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에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왜 너와 나의 없다의 정의가 서로 다른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의심해 봅니다. 혹시 <어린 왕자>의 어른들이 그리고 루트비히의 아빠가 합리적 '언어'의 세계에 갇힌 것은 아닐까? 하고요.
성장하는 것은 나의 언어에 한계를 짓는 일일까요? 어째서 어린이가 보는 것을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길까요? 편견에 갇히지 않고 언어 이상의 세상을 상상하며 자라는 방법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