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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k parks at the park Nov 07. 2023

우리가 아니라 나

세대론에 포위되지 말고 나와 너의 목소리를 듣자

넷플릭스에서 제공되는 영화 '늙은 아빠들'

최근에 본 영화 중 '늙은 아빠들'이란 영화가 있다. 대충의 영화 스토리는 미국의 X세대에 속하는 중년의 남성들이 뒤늦게 꾸린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 발생하는 좌충우돌의 코미디(영화의 주인배우인 빌 버(Bill Burr)는 미국에서는 유명한 코미디언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 있지 않은 인물이다.)이다. 영화를 짧게 요약하자면 구세대의 신세대에 대한 적응기라고 할 수 있다. 늙은 아빠들이 육아법에서 회사운영 및 연애사에서 새로운 환경에 고군분투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코미디 영화로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 적응이 내키지않는 '절충'안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를 확장시켜 세대론을 넘어서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하고 바라다 보고 싶었다. 어떤 세대,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새롭게 적응시켜 나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롯이 '나'의 목소리를 귀기울이고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속에서 중년의 남성들이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힘겹게 따라가기 위해서 각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부분에서 일종의 '세대충돌'과 같이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인 늙은 아빠들의 세대에서는 남자들끼리 키득이며 나눌 수 있었던 말들이 이제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말들로 받아들여진다(물론, 문화적 배경이 다른지라 우리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져 느껴질 수 도 있다). 또한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자 그들의 행태를 따라해 보지만 무시당하는 장면도 나온다.(손인사를 무시당하는 장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과 우리나라의 문화적, 언어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세대간의 갈등이나 이견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세대에 포함될 때 우리는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게 된다. 아마도 인간의 속성상 비슷한 시대와 환경에서 같이 자라고 살아가면서 가지게 되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다른 세대보다는 서로간에 더 잘 이해되고 소통하기 쉬운 점이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이전세대에는 당연하고 익숙한 모습이 새로운 시대에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세대간의 다른 문화와 정서는 소통의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것을 우선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세대론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내가 바라다보는 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세대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구세대의 모습이 아니라 세대에서 벗어난 나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만들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보다 집단주의나 지연,학연,나이 등으로 범주화하는 경향이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으므로 세대간의 간극은 더 크게 벌어질 수 있으며, 서로간의 수용의 문제에서 논쟁적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웃픈 장면 중 하나가 식당엘 가면 단체 손님의 경우 메뉴를 '간소화'시켜줄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문화였다. (일종의 집단주의와 획일주의가 짬뽕된 우스꽝스러운 문화 아닐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도 형사관들이 중국집에서 밥먹을때 극중 김상중이 자신이 시킨 메뉴와 다른 똑같은 짜장면이 나왔을 때'난 간짜장 시켰는데'라고 말하니 옆의 고 변희봉님이 나무젖가락이 깔끔하게 쪼개지지 않으면서 쌍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옆의 재수없는 서울형사 김상중의 태도에 대한 꼴보기 싫음의 표현처럼 보인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정체성이나 사고는 장점도 있겠지만 분명 심각한 단점이 있다. 세대주의를 일종이 집단주의의 범주에 넣어 바라볼 때 집단주의의 가장 극악한 사례가 역사상 나타났던 야만적인 파시즘이 아니겠나. 일상적인 면에서도 그것은 '눈치'를 봐야 하는 일종이 '자기검열'의 구속적 생활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기한 바와 같이 세대간의 비교가 아니라 한 세대, 한 집단으로 사람들을 묶을 때 발생하는 '우리'의 관념에서 벗어난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목소리를 키워낼 수 있는 전제조건이 구비될 때 오히려 세대간, 집단간 소통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 나의 기호와 의식을 집단의 평균에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목소리를 내고 그만큼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원칙을 바로 세울 때 소통의 장의 열리지 않을까.


어떤 세대도 어떤 세대보다 더 독특하게 낫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새로운 세대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기존의 구태의연한 부분이 개선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어떤 국가에서도 공통된 흐름은 집단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활로를 뚫어주는 방향으로 작동했다고 본다.

새로운 세대의 공통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것은 '나'라는 주체가 그것을 향유하고 그를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 아닐까? (그런것이 가능할 때, 국내 모 기업의 미국광고에서처럼 중년의 남성이 보드를 타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고, 신세대가 LP판을 진공관 오디오를 통해 듣는 음악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여유와 관용의 문화를 키워나갈 때 오히려 세대론이 무너지고 세대간의 소통이 더 원활해 질 것이다. '나'가 보장되는 자유로운 문화에서 나의 선택권과 행동의 반경은 넓어지며 그만큼 다른 세대의 무수한 '나'와 내가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나의 목소리에 귀기울수 있는 여유는 그만큼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고자 하는 소통의 문화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우리의 말에서도 '우리'라는 말보다 '나'라는 말을 더욱 자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사진 한 장을 보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그 유명한 타이거 우즈가 PGA골프 대회에서 플레이할 때, 골프의 신을 영접하고도 사진을 찍기보다 그저 맥주 한 잔 들고서 느긋하게 그의 플레이를 지켜다보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일약 맥주회사의 광고모델이 된 적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남들의 눈치따위는 보지 않는, 오로지 나의 목소리와 나의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그런 여유있는 개인의 모습을 본다. 우리사회에서도 그런 여유로운 개인들이 많이 발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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