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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Mar 25. 2024

임금을 감동시킨 닭

이첨 <응방을 폐지한 닭>

충혜왕 때 응방 소속 관리가 닭을 매의 먹이로 주었다. 매가 날개 하나를 다 먹자 거의 죽어 가는 닭을 자루에 넣어 두었는데, 아침이 되자 그 닭이 울었다. 이 일을 아뢰자 성상께서 측은하게 여겼다... 닭이 우는 것은 본성이므로 듣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그러다가 다친 닭이 한번 울자 임금이 감동하고 나라에서 관청을 폐지했다... 당시 사람들은 매를 잡느라 고생했다. 높은 곳에 사는 매를 잡으려다가 절름발이가 된 사람도 있었고, 바다에 사는 매를 잡으려다가 배가 가라앉으면서 빠져 죽은 사람도 있었다... 매의 폐단을 말하는 사람들의 호소가 어찌 닭 한 마리의 울음소리 정도에 그쳤겠는가...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은 믿지 않고 닭이 한번 울자 감동했다... 임금에게 평소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닭이 울기를 기다린 뒤에야 측은하게 여기겠는가(주).


글을 쓴 사람은 이첨이라는 분으로, 그는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했던 문인입니다. 본관이 신평인데, 지금의 당진시에 위치한 신평과 동일한 지명이라는 것을 알고 적잖이 반가웠던 분이기도 합니다.


응방은 사냥용 매를 담당하는 관청이었습니다. 원래 고려에는 없던 이었는데,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원나라의 요구로 설치했던 기구였습니다. 고려의 매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원나라에서 조공으로 요구하였는데, 이후 고려의 국왕들도 매사냥을 즐기게 되면서 규모가 커지고 상설 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매를 잡고 기르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었고, 그 폐해가 극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동청(참매) / 출처 : 네이버 이미지

당시 사람들은 매를 잡기 위해 높은 곳에 올랐다가 낙상을 당해 절름발이가 되기도 했고, 바다에 사는 매를 잡으려다가 빠져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매에게 먹일 많은 먹이도 문제였지만, 밭의 곡식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심지어 왕의 총애를 입은 응방의 관원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응방이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음에도 임금들이 매사냥에 빠져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처음 닭의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입니다. 어느 날 응방에서 기르던 매에게 닭을 먹이로 주었는데, 매가 닭을 물어뜯어 거의 죽게 되자 자루에 넣어 산 채로 버렸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자 닭은 언제나 그랬듯이 소리 높여 울면서 새벽을 알렸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제 할 일을 다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왕이 응방의 폐지를 논의에 부쳤다는 것입니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그러나 응방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이첨은 도리어 안타까워합니다.

'임금에게 평소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닭이 울기를 기다린 뒤에야 측은하게 여기겠는가.'


'임금이 되어서 닭의 소리는 들을 줄 알면서, 어찌 백성의 소리는 들을 줄 몰랐단 말인가?'

'고통 속에서도 제 할 일을 다 하는 닭에게는 감동할 줄 알면서, 어찌 제 할 일을 다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에게는 감동하기는커녕 도리어 가혹하게 대한단 말인가?'

'진즉 깨닫고 조치를 취했어야 할 일인데,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간 후 이제야 하는가?'

이첨은 매사냥의 재미에 빠져 백성의 고통을 살피지 못하는 임금과 그런 임금에게 간언 하지 못했던, 심지어 임금이 닭을 보고 측은히 여겨 관청의 폐지를 논의했던 순간에도 응방 혁파를 부르짖지 못했던 신하들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상황이 과거와 달라졌지만, 그때의 임금과 신하들의 모습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중첩돼 보이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혹시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무엇이 누군가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매사냥을 사랑한 임금이 백성들을 고통에 빠지게 했던 것과 같이 말이지요. 죽어가는 닭이 우는 것을 들은 후에야 깨닫지 말아야 할 텐데.


'혹시 내게도 응방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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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이규보 외, <한국 산문선 1>, 2018, 민음사


⁕ 월, 목 - <문장의 힘!>

⁕ 화, 금 - <삶, 사유, 사람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 수, 일 - <딴짓도 좀 해보지?>


목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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