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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Nov 24. 2024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젊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스무 살의 젊음을 부러워할 때 50대의 상사는 나의 젊음을, 70대의 엄마는 50대의 젊음을, 90을 바라보는 옆집 할머니는 엄마의 젊음을 못 견디게 부러워하며 말한다. 참 좋은 시절이라고.

더는 잡을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나의 청춘은 이미 끝났다고 탄식하고 싶지 않다. 그 시간에 오늘의 젊음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도 있다.
☞ 안희정, 『마지못해 사는 건 인생이 아니야』, 대경북스, 23쪽

살다 보면 세상에는 참 무서운 것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것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우리 인간만의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늘 등속운동을 합니다. 폭염이라고 해서, 혹은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고 해서 시간이 다른 때에 비해 느리게 흐르거나 하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존재의 근본을 흔들 만한 괴로움에 빠져 있다고 해서 그 시간이 더 더디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하루는 참 더디게 가는데 그렇게 모인 1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1년은 더디게 가는데 이것이 어느새 10년을 이루게 되더라.


어디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어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저 역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어느 누구도 틀린 말이라고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몸소 그 말의 진위를 실감하며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시간은 등속운동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고,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그럴 것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흘러갈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입니다.


참고로, 저의 나이는 쉰셋입니다. 제 아들은 스물둘이고요. 부럽냐고요? 뭐 하나 마나 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씩 녀석을 바라보면서 그런 말을 합니다. 만약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삼십 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말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삼십 년까지 굳이 거슬러 올라갈 필요까지는 없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고작 십여 년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해도 저 유명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정도입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과연 저는 뭘 하며 살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세상은 지극히 공평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테니까요. 그런데 묘한 것은 일정한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자신 앞에 놓인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들이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그 단순한 사실도 생각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직 젊음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대중적인 인기도에 있어 최정상을 달리고 있는 한창 잘 나가는 연예인이 자신의 인기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음은 상대적이라는 저자의 말에 적극 공감이 갑니다. 여기에서 상대적이라는 말은 더 나이 든 사람들이 보다 더 젊은 사람들을 보는 시각의 차이에 근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젊음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 그 자체도 결국은 상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면 해석될 여지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이런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아들을 보며 그 젊음을 못내 부러워하는 저 역시, 여든이 넘은 장인어른에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는 걸 제가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걸 왜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저 같은 경우엔 명백히 그러했습니다. 아들의 젊음을 부러워할 줄만 알았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장인어른의 눈에 비친 저 또한 인생의 황금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위에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됩니다. 저자는 '더는 잡을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나의 청춘은 이미 끝났다고 탄식하지 말자고, 그럴 시간에 오늘의 젊음을 낭비하지 말자'라는 다짐을 합니다.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잡을 수 없는 것도 맞고, 엄밀하게 말하면 '나의 청춘'이 끝난 것도 명확한 사실입니다. 청춘이라는 건 한창 젊고 건강한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봄철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며 사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 수명 백 세 혹은 백이십 세 시대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사십 대 중반 이상의 나이를 관통하고 있다면, 이제 그(그녀)에게 더는 푸르른 봄날 같은 시기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래서 가수 나훈아 씨가 그의 노래에서 그렇게 애타게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사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어쩌면 나이가 든 사람이 하는 우격다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어지간해선 젊은 세대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경우를 본 기억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외치거나 '뭘 시작하든 늦은 나이는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죄다 나이가 든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이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지나간 청춘을 아쉬워해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청춘만큼의 가치까지는 없더라도 남은 이 황금 같은 시간(누군가가 봤을 때에는 분명히 그럴 할 것입니다)을 쪼개어 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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