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일 차.
네덜란드의 유명한 철학자인 스피노자를 떠올리면 사과나무가 먼저 생각납니다. 아닙니다. 선후 관계가 바뀐 것인지도 모릅니다. 식탁 위에 놓인 몇 개의 사과를 보면 사과나무가 떠오르고 그제야 사과나무를 운운했던 스피노자가 소환되는 게 옳은 순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난데없이 웬 사과나무에, 심지어는 생뚱맞게도 스피노자를 거론하냐고요?
누군가가 스피노자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내일 당장 세상이 끝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거냐고 말입니다. 죽음이 임박한 그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흘러나옵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으니까요. 과연 그래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자, 후세에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저명한 철학자가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만약 저라면 그 순간에 뭐라고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못 가본 곳에 그때라도 다 가볼 것이고, 살면서 응어리가 진 사람들과 미처 풀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죄다 털어내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못 먹어 본 음식이라도 죽기 전에 실컷 먹어본다거나, 어떤 종류가 되었건 간에 누군가에게 전했어야 할 마음을 당사자에게 표현한 후에 죽을 것이라고 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대답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꼭 할 것이다' 혹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주어진 여정을 충실하게 마무리하겠다'라는 결연한 의지로 들립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했건 간에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대철학자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제가 요즘 말로 굳이 스피노자를 코스프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약 두 시간 전쯤 집을 나올 때 탁자 위에 놓인 두 알의 사과를 보았습니다. 저 사과가 어디서 왔을까, 누가 저렇게도 먹음직스럽게 잘 길렀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사과가 얼마일까, 하는 점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저렇게 탐스러운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가 있는 곳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그림, 특히 풍경화엔 완전히 젬병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사과나무가 버티고 선 풍광을 도화지 속에 담아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여기서 난데없이 제 머릿속에선 옛날에 어떤 위대한 사람이 세상의 종말이 오면 사과나무 어쩌고 저쩌고 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정말 좋아진 건 분명합니다. 이 간단한 사실 하나를 알기 위해 굳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도서관의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되는 세상입니다. 몇 글자만 두드리고 나니 제가 필요로 했던 내용이 눈앞에 그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고맙게도 스피노자가 한 말이 맞았습니다. 오래된 기억이 아직도 유효한 것을 보며 여전히 죽지 않았군, 하며 혼자 대견한 미소를 지어 봅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던, 상식도 아닌 그런 쓸데없는 사실이 오늘 제게 글감을 던져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스피노자가 그의 방식대로 얘길 했으니, 이제 저만의 방식대로 제가 얘기할 차례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저는 오늘 밤 한 편의 글을 쓰고 있을 것이고, 내일 종말 직전에도 저는 또 다른 글의 소재를 떠올리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