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21.
오늘의 문장
만일 내가 한 달에 몇 병씩 쓰는 잉크병에 내 붉은 피를 담아 쓴다면, 그러면 난 어떻게 쓸까.
더 적게 쓰고 더 짧게 쓸 것이 아닌가.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읽고 경험하느라, 내면의 느낌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 박노해, 『걷는 독서』중에서
나의 문장
오늘의 문장을 보면서 저는 마지막 문장의 끝부분을 주목해 봅니다. 내면의 느낌에 머물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 말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봐야 합니다. 너무 많이 읽고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쉽게 생각해 보자면 정보가 많다고 해서 참고할 만한 자료를 생산해 낸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느낌이라는 건 어쩌면 사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아 성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테고요. 여기까지 생각이 진행되면 저는 으레 쇼펜하우어가 떠오르곤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책, 『쇼펜하우어 문장론』에서 너무 많은 독서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는 글을 잘 쓰기 위한 전통적인 세 가지 조건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겠습니다.
사실 누가 생각해도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독서는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에 속합니다. 어쩌면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창작에 더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게 일반적일 겁니다. 그러나 쇼펜하우는 독서라는 행위는 타인이 행한 사색의 결과를 비판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독서를 통해 도달하는 일정한 학문적인 수준이나 지식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무 많은 책을 읽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처럼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걸작을 썼을까, 하고 말입니다. 지금과 같이 글쓰기 교본 따위가 있을 리도 없고, 뭔가를 참고해서 책을 쓰려고 해도 그런 책조차 없었을 그 시절에 말입니다. 분명 그들은 깊은 사색을 통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을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책 한 권을 쓰려고 해도 앞뒤 사방이 꽉 막힌 밀폐된 공간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형국이었을 겁니다.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읽으려 합니다. 아니 어쩌면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글을 쓰려는 우리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일 테니까요. 게다가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경험을, 누군가가 하니까 '나' 또한 하면서 살아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시대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박노해 시인의 말을 아우른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사색, 즉 내면의 느낌에 머무르려면 덜 읽고 덜 경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 기준치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없을 겁니다. 다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것도 읽어야 하고 저것도 읽어야 하는 것 같은 강박관념,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봐야 할 것 같은 줏대 없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