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글을 만나기 전까지
퇴근이 늦었습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몇 분만 더 있으면 어느새 밤 8시 반입니다.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가끔 도지는 쓸데없는 완벽주의 때문입니다. 아무도 남아서 잔업을 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서 묵묵히 어두워질 때까지 기어이 학교에 남아 있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남아 일하는 저를 보면서 아내는 종종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합니다. 정작 마음에 들 만큼 일을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동료 선생님들이 모두 집으로 간 지 오래입니다. 제가 이 고즈넉한 시간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 있을 거라고는 저 역시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걱정할 가족을 생각하니 얼른 발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급해집니다. 차도 없는 데다 운전까지 하지 않으니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게 되면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걷는 내내 어둠이 온몸을 엄습해 옵니다. 사위가 고요하기만 합니다. 세상이 이처럼 고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학교 건물 주변에만 조명이 드문드문 비칩니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암흑 천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있는 곳은 읍소재지 중에서도 조금은 떨어진 '리' 지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건너편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에서 뿜어내는 불빛들만 요란할 뿐, 그곳 외엔 어둠만 도사리고 있습니다.
밤이 되어서일까요, 학교 앞을 지나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차량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사실상 밤이 되면 학교 근처는 우범지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뜹니다. 대략 80미터쯤 걸어 내려가면 작은 네거리와 신호등이 있습니다. 인적도 드물고 교통량도 적은 편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저녁 6시 이후에는 점멸등으로 바뀌는 곳입니다. 합법적으로 신호와는 상관없이 길을 건널 수 있는 때입니다. 바로 그 신호등을 건너 40미터 정도 걸어 내려가야 버스정류장이 나옵니다.
차도로 들어서니 그제야 늦은 시각 바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몇몇 차량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차창으로 내비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피곤하듯 저들도 당연히 피로에 찌들어 있는 표정입니다. 안 그래도 몸이 천근만근인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더욱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어쩐 일인지 무겁습니다. 마치 커다란 쇠공이 묶인 족쇄를 끌고 다니는 죄수가 된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입니다.
하늘은 벌써 깜깜해졌습니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만 주변을 밝힐 뿐, 그 어디에도 빛이 닿는 곳은 없습니다. 뚜벅뚜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제 발소리가 하나의 메아리가 되어 제 뒤꽁무니를 따라나섭니다. 금방이라도 제 뒷덜미를 낚아챌 기세입니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대한 실루엣으로 다가옵니다. 민심이 흉흉한 세상이라 남자가 다가올 때에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야 합니다. 다행히 실루엣의 주인공이 여자라면 저는 마음이 놓이지만, 이번엔 저쪽에서 잔뜩 긴장한 채 저를 지나쳐 갑니다.
드디어 버스정류장에 섰습니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가는 방향까지는 내리막길입니다. 그 내리막길을 따라내려가면 큰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는 그야말로 인적이 없는 곳입니다. 경사로를 따라 일정한 거리마다 가로등이 서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금은 더 어두워지는 가로등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약간은 희미한 빛이 퍼지며 주변을 비추고 있습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전조등을 밝힌 채 지나갈 때면 사위가 갑자기 환해졌다가 이내 어두워지곤 합니다. 그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집니다.
차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모니터의 실시간 버스 정보를 확인합니다. 아직 15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일단 오늘의 일기를 쓸 생각으로 한 줄의 글을 적어 내려 갑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탓일까요? 꽤 감성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던 글이 몇 문장 적지 않아 막히고 맙니다. 붙들고 있다고 해서 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는 잠시 글에서 빠져나오는 게 좋습니다.
대략 25도 정도의 경사진 길을 따라 눈길이 더듬어 내려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봅니다. 눈에 들어온 하늘, 하마터면 그 자리에 얼어붙을 뻔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 자체가 제겐 하나의 볼거리였습니다. 산봉우리 두 개 사이에 쏙 들어앉은 구체(球體)가 눈에 띕니다. 그게 태양이건 달이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시각에 볼 수 있는 장관인지도 모릅니다. 어디를 가서, 또 언제 이런 야경을 볼 수 있을까요? 과연 그 어떤 말을 동원해야 저만큼 아름다운 장관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솜씨가 뛰어난 예술가라도 인위적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장면일 겁니다.
저는 좀처럼 그 구체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10분 뒤면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판을 보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막연히 저 구체에 정신이 팔려있다가는 버스를 놓칠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그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더니 제가 딱 그랬습니다. 한 주의 업무를 끝낸 금요일 저녁에 이 멋진 장관을 볼 수 있게 되어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온종일 긴장했던 마음에서 비로소 놓여납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자연스레 차창에 머리를 기댔습니다. 문득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몰골이 초췌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문득 제게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뜬금없이 잘 지내냐는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습니다. 누군가가 툭 치고 지나가듯 물을 때면 늘 잘 지낸다는 대답을 했던 저였습니다. 아마도 거짓말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간단한 질문에 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조금도 괜찮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이번엔 기차에 올랐습니다. 몸은 늘어질 대로 늘어졌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몇 글자 두드려대다 문득 차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어쩐 일인지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광은 좀 더 현실적으로 보여 마음이 놓입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맞지?”
아마도 그래서 다시 한번 눈치 없이 제게 묻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괜찮아. 걱정하지 마. 끄떡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철석같이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가 누구를 속일 수 있을까요? 전혀, 또는 조금도 괜찮지 않으면서 짐짓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걸 제가 먼저 알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사위의 풍광에 압도된 탓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눈부신 야경을 보면서 차마 괜찮지 않더라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애꿎게 속으로만 다시 한번 되뇌었습니다.
‘나, 정말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