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의 대화 이후, 영실과 지원은 자주 함께 자전거를 탔다.
영실은 일부러 느리게 페달을 돌려 그녀의 속도에 발을 맞췄다.
“영실 씨, 괜찮아요? 나 때문에 너무 천천히 가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천천히 가면 풍경이 더 잘 보이죠.”
영실은 그렇게 말하며 지원을 뒤돌아봤다.
노을이 지는 한강 둔치를 달릴 때면, 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나란히 겹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끔 그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둘 다 미소를 지었다.
휴게소 벤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지원이 말했다.
“자전거 타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요.”
“왜요?”
“아무 생각 안 해도 되잖아요. 그냥 페달만 밟으면 되니까요.”
영실은 잠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햇빛에 비친 땀방울이 이마에서 반짝였다.
그는 문득, 오래전 잊었던 감정을 느꼈다.
“지원 씨.”
“네?”
“우리, 요즘 자주 보죠?”
“그러게요.”
지원은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생각했다.
'영실 씨가 먼저 사귀자고 하면… 아마 거절 못할 것 같아요.'
잠시 눈을 마주친 순간,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그날 이후로도 둘은 여러 번 함께 자전거를 탔다. 라이딩이 끝나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영실은 그의 상처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지원은 그녀의 외로움을 천천히 이해했다. 말은 적었지만, 마음은 조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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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형의 고깃집이 문을 닫은 뒤, 타바의 회식 장소는 자연스레 주성의 가게로 옮겨졌다.
영실은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굳이 거길 가야 하나…’
그의 속은 뒤틀렸지만, 다들 정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라이딩을 마치고 회원들이 주성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지원은 하얀 져지에 머리를 묶고 테이들에 앉았다. 영실은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일부러 지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코스 어땠어요?”
“죽을 뻔했죠. 근데 영실 씨 덕분에 살았어요.”
둘의 웃음에 테이블 분위기가 잠시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주성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잔을 들며 비웃듯 말했다.
“야, 둘이 요즘 진짜 붙어 다닌다며? 어디까지 갔어? 벌써 그 단계야?”
순간, 지원의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에이~ 뭐 어때. 다 어른인데. 라이딩 끝나고 사랑 타임 한 번쯤 있을 수도 있지.”
몇몇이 억지로 웃었지만, 지원의 표정은 하얗게 질렸다. 그때 영실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형,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원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작게 말했다.
“… 그렇군요. 아무 사이도 아니구나.”
그리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해요. 저 먼저 갈게요.”
“지원 씨, 왜 그래? 농담이잖아.”
주성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깃집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영실은 참지 못했다.
“형, 왜 자꾸 사람 기분 상하게 해요?”
“뭐가? 난 그냥 농담했는데.”
“그게 농담이에요?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게?”
주성은 느긋하게 술잔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넌 뭐야? 진짜야? 아니야? 내가 봤을 땐 지원 씨가 너한테 마음 있어 보이던데? 눈치 못 챈 거야?”
“형, 그만하세요.”
“왜? 찔려?”
주성은 잔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넌 늘 그래. 착한 척하면서 뒤에선 호박씨까지. 재형이 망한 것도 결국 네가 부추긴 거 아니야? 회사 그만두고 고깃집 해보라고?”
그 말에 영실의 손이 떨렸다. 주성은 그 떨림을 비웃듯, 더 깊게 찔렀다.
“봐봐. 또 네가 잘못한 것 같지? 너는 그런 사람이야. 정의롭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남을 망치지.”
영실의 손이 떨리다 못해,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입 닥쳐요!”
순간, 불판 위에 있던 집게가 떨어지고, 불꽃이 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성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주성은 눈빛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결국 손부터 나오는구나.”
회원들이 급히 달려와 두 사람을 떼어냈다.
회장이 소리쳤다.
“둘 다 그만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며칠 뒤, 타이거바이크 공지란에 공고가 올라왔다.
“회원 간 모욕 및 분란 유발로 인해 주성 회원을 제명합니다.”
댓글이 쏟아졌다.
“이제야 속이 다 시원하다.”
“동호회 분위기 다시 살아나겠네.”
하지만 영실의 마음은 시원하지 않았다. 지원은 연락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그녀의 목소리만 영실의 귀에 맴돌았다.
'그렇군요. 아무 사이도 아니구나.'
그 말은 짧았지만, 오래도록 그의 마음에 파문처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