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라 Sep 14. 2023

어느 밤과 레몬 향 기억

나는 지금도 그날의 기억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사람은 한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산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일생을 장악할 만한 순간을 경험하는 운 좋은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다. 매일 나름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시험에 마음을 졸이고, 늦잠을 잔 날엔 투덜대며 밥 대신 속을 달랠 사탕 한두 개를 주머니에 찔러 넣던 그런 학생. 그날의 나도 그랬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기말고사 전날 저녁이었다. 급식을 먹은 후 잠을 깰 겸 산책을 하자는 친구들의 말에 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어두웠다. 시험을 앞두고 침울한 우리와 꼭 닮아있었다. 운동장을 따라 걷는 동안 긴 적막이 이어졌다. 저마다의 고민이 묻어 나는 고요함이었다. 한 친구는 잠을 깨려 얼어붙은 손으로 찬 커피를 마셨고, 또 한 친구는 어딘지 모를 먼 곳에 시선을 던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며 손을 매만졌다. 서늘한 바람이 손끝을 스칠 때마다 괜스레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빨갛게 얼어붙은 손끝이 안쓰러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때, 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이 따끔하게 아려왔다.


    아야, 하는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겨울 바람에 잔뜩 튼 손은 작은 자극에도 짜증스레 반응했다. 나는 얼굴을 살짝 구긴 채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웬 사탕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그제서야 아침에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레몬 사탕의 존재가 떠올랐다. 늦게 일어난 날 으레 그랬듯 습관적으로 챙긴 것이었다. 나는 포장지에 긁혀 살짝 부어오른 손끝을 다른 손으로 몇 번 비비적거렸다. 그리고 사탕을 꺼냈다. 단 것이라도 들어가면 지금보다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사탕의 포장을 뜯어 입안에 넣었다.


    학교 건물 입구에서 뒤처진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생각보다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뒤처진 사이 친구들은 이미 신발을 갈아 신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의 마지막 코너를 꺾어 건물로 향했다. 조용한 운동장과 소란스러운 건물 안, 그 사이의 경계면을 뚫고 지나가려는 찰나. 전경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 뒤로 바람이 불어 왔다. 나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고, 거짓말처럼 모든 것에 압도되었다. 작은 눈동자에 하늘이 달려들었다. 녹아내린 사탕이 이제 막 단맛을 내고 있었다. 밤하늘과 함께 나의 시간이 멈췄다. 저 멀리 걸린 샛노란 달,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 가득한 구름으로 하얗게 얼룩진 공중과 살랑이는 바람, 볼을 빨갛게 물들이던 찬 공기, 얼어붙은 손, 그리고 입안을 채우는 달콤한 레몬 향기.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힘들었던 하루와 꼭 닮은 깊은 어둠의 하늘이 벅찰 정도로 찬란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 그 밤의 하늘은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하늘이었다.


    사람은 한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산다고들 한다. 잊지 못할 순간의 기억은 어디엔가 담겨 문득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레몬 사탕을 좋아한다. 사탕과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풍경은 언제든 내 삶을 아름답게 빛내고, 나는 그 감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문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 나는 레몬 사탕을 꺼낸다. 볼 한쪽에 머금은 사탕이 녹아가면 눈앞에 떠오르는 새까만 하늘과 사탕을 닮은 노란 달, 하얀 구름, 그날의 온도, 벅참, 입안의 레몬 향기-


    나는 지금도 그날의 기억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작가의 이전글 낙원의 문을 여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