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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l 15. 2023

마당에 쌓이는 그리움.

대문을 열자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반사적으로 얼굴이 구겨진다. 한창 자랄 저들에 대한 안타까움일까? 이제는 지켜 줄 수 없음에 대한 미안함일까? 그도 아니면 정말, 만성 짜증이려나.

 

좁디좁은 마당엔 무화과, 포도, 석류, 그리고 이름 모를 자잘한 나무들이 엉망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마치 자신을 먼저 보란 듯, 빽빽하게 뻗은 가지와 잎들이 메마른 바람과 태양 빛 아래에서 차갑게 시들고 있다.


‘나는 지금 썩어가고 있어요.’라고 외치며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서 어쩌라고?’하며 외면해 버린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다시 힘을 내 씩씩하게 자라도록 돌봐 줄 수도, 엉망으로 숲을 이룬 나무들을 당장 베어버릴 수도 없다. 지금은 그저 내 버려두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앙상한 가지로 버티던 지난겨울. 봄이 오기 전에 모두 베어 버려야 했다. 더는 넝쿨을 타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지지대도 치워버렸어야 했다. 마당에 꾸역꾸역 자리 잡은 작은 숲을 진작 없애 버려야 했다. 언제나 후회는 반복된다.

 

삶의 종착역은 죽음이라고 했던가?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순간들을 지나, 수많은 시련을 버티는 이유의 끝은 잔인하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삶을, 쉬이 받아들이는 이는 드물다. 정해진 끝을 헤아리고 있다 해도 언제나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이다.

 

나는 저들에게 수도 없이 말했다. 너희들을 어떻게 죽일지에 대해서도 하루가 멀다고 이야기했다. 물도 주지 않고, 돌보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저들이 늘 하던 대로 새싹을 틔웠고, 예쁜 꽃으로 환하게 인사를 했다. 이젠 열매까지 흔들어 보이며 자신들의 할 도리를 다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이겨낸 열매는 탐스럽기보다 안타깝다.

 

생이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삶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품은 채로. 이미 손을 내민 죽음은 쉽게 그 손을 놓지 않는다. 다시금 남은 생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군데군데 피어난 작은 열매들이 생을 말하고 있지만, 미처 자라지 못한 가지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잎의 하늘거림은 애처롭다. 인정할 수 없는 몸짓들이 기괴하게 춤을 추며 흩어지다 ‘갑자기’ 사라지게 되겠지.

 

붉디붉은 석류가 부끄럽게 속살을 보이고, 통통하게 잘 익은 무화과를 손을 뻗어 따 먹었다. 대롱대롱 탐스럽게 열린 포도가 신기했다. 바람에 쓸러 부러진 가지를 꿰매주고, 무겁게 처지는 넝쿨이 버틸 수 있게 지지해 주고, 더 단단하게 클 수 있도록 약도 주던 좋은 사람이 있었다. 이제 막 꽃을 피우고 귀엽게 열린 작은 열매가 약해져 떨어지지 않도록 응원하며 지켜봐 주던 그런 사람이 있었다. 저들은 그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스스럼없이 쑥쑥 자랐고, 수줍은 듯이 발그레 익어갔다.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 주었기에 탐스럽게 빛나던 마당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버린 손길. 앙상한 나뭇가지는 차디찬 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촉촉하게 내려앉는 비에게조차 흔들렸고, 평온했던 어둠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의 손길은 성가시기만 하고, 서툴러서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그가 없는 마당은 전에 없이 넓게 느껴졌다. 흙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갔다. 더 머물 수도, 버텨내기도 점점 지쳐가고 있다. 저들은 처음부터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기에 떠나버린 그가 너무나도 그립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유난히 더 지쳐버린 풀 내음이 먹먹하게 가슴을 찌른다. 그리움인가 보다. 아껴주고 보듬어주며 든든하게 버텨주던 당신이 없어진 지금, 모든 곳에서 당신의 흔적이 묻어난다. 손길이 닿았던 구석구석에서 나는 향인가 보다. 담장을 타고 나간 그늘에도 그리움이 번져, 회한의 미소가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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