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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솜 Jul 17. 2023

운 좋은 여행: 러시아

다시 탄 횡단 열차 

 편안히 씻을 수 있는 화장실과 포근히 누울 수 있는 침대와는 잠시 이별해야 할 시간이다. 다시, 횡단열차에 올라야 한다. 안 씻고 버틸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르쿠츠크 역 샤워실을 사용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가족, 친구들과 이별하는 많은 러시아 인들 사이 모스크바로 향한다는 설렘 가득 안고서. 인사할 친지가 없는 초초와 나는 우리가 탈 횡단열차와 즐거운 인사를 할 뿐이었다. 근데, 우리에게도 인사할 누군가가 생겼다.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날 때의 기쁨이란, 심지어 바로 옆 침대라니. 든든한 아군 한 명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서로 별다른 도움을 주고받지 않아도, 그저 인사만 나누어도 괜히 풍요로워진다.

 다시 열차를 탄다는 걱정과 설렘에 잊었던 것 하나, 러시아의 5월은 백야의 시작이라는 것. 새벽 3시가 넘어서 침대에 누운 우리는 그대로 동트는 것을 보고 말았다. 여독 때문일까, 다시 탄 횡단열차에 벌써 적응을 한 것일까? 밝고 시끄러운 와중에 잘도 잤다. 조금 더 아늑하게 잘 수 있는 요령을 부리기도 했다. 지난번 탄 열차와는 달리 이번 열차에서 초초와 나는 복도 쪽 침대를 선택했기에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잘 못하면 복도에 굴러 떨어져 바닥에서 잠을 청할지도 모르는 일.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방어막을 쳤다.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준 여분의 침대보

  커튼은 어디까지나 잘 때만 칠 수 있다. 첫 번째 탄 열차의 자리와 또 다른 점은 침대를 접어 식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도 자리는 둘이 사용하면 온전히 우리의 영역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열차부터는 초초와 마주 보고 편안히 앉을 수 있었다. 우리만의 창문이 생겼고, 우리만의 의자가 생겨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식단표를 짜서 우리의 창문에 붙여둔 것이었다. 흔들리는 열차에서 개발새발 글씨로 쓴 야매 식단표는 그저 흘러가는 횡단열차의 시간 속에서 활력이 되어주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내게 또 다른 활력이 되어준, 잊지 못할 것 하나. 2019년 5월 20일 오후 우연히 고개를 돌려 보게 된 러시아 초등학생들의 환한 미소와 인사. 푸른 하늘과 드넓은 초원 속 그 밝은 미소와 새찬 손짓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실 창 밖만 멍하니 바라보아도 예기치 못한 풍경이 찾아와 준다. 새파란 하늘에서 새하얗고 뿌연 하늘이 되었다가, 예쁜 구름이 걸린 파란 하늘이 된다.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 구름 사이로 줄기 줄기 갈라진 빛이 내리쬐는 평야, 소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마을. 평온하다.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에 그때의 그 순간이,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했다. 여유와 풍경을 온전히 누리기에 열차의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그러한 아쉬움이 열차에서의 시간을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인데. 현실감 하나 없는 횡단열차에서의 시간 속 내가 문득문득 눈물 나도록 그립다. 처음 만난 옆 자리의 한국인, 소중한 친구와 시간을 함께하는 것, 왁자지껄 했던 열차가 조용해지는 그 순간들. 이 모든 조각들을 지금까지도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는데 그 풍경이 매 번 색다르게 느껴져서 처음 보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계속 창 밖만 바라본다.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낸다. 한 순간도 놓치기 싫어서, 아까워서. 내가 잊지 못할 것 또 하나,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들판과 푸른 하늘. 긴긴 해가 점점 지는 모습, 나무가 가득했던 초록빛 풍경이 금빛 초원이 되는 것을 이전에는 유심히 보지 않았다.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지나가는 풍경이 이렇게 값질 수 있을까?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끝이 점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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