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신비주의적 해석
I. 각성이란 무엇인가?
만화의 최종 장,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있다. 숨을 헐떡이며 무시무시한 악당을 눈앞에 두고, 거의 빈사 상태로 악당을 노려본다. 악당은 음흉하게 웃으며 주인공에게 여유로이 다가와 피할 수 없는 일격을 날린다. 치명상을 입은 주인공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며, 주인공의 패배가 확실시된 상황. 악당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픽 웃으며 등을 돌리지만, 이내 흠칫 놀라며 다시 쓰러진 주인공 쪽을 바라본다. ‘고오오-’ 따위의 효과음과 함께, 주인공은 강력한 힘을 ‘각성’하고 ‘파워 업’해 단숨에 악당을 압도한다.
위와 같은 ‘각성’ 전개는 각종 문화현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드래곤 볼”(1984~1995)과 같은 소년만화에서는 물론이고, “매트릭스”(1999)와 같은 영화에서도 작품 전개의 주요한 분기점에 ‘각성’이 등장한다. 각성이란 무엇인가? 각성(覺醒/awakening)은 그 의미상 ‘깨달아 정신을 차린다’는 의미이다. 즉 각성은 그 의미상 일종의 깨달음의 체험이다. “드래곤 볼”과 같은 소년만화에서 이 깨달음의 대상은 보통 존재의 본성, 자기에게 숨겨져 있던 힘 등이다. 그리고 체험으로 존재의 본성을 체득한다는 것이 각성 서사의 본질이라면, 각성 서사는 분명히 ‘신비주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본체의 회복, 본성의 체득, 깨달음을 위시한 ‘각성’의 특성과 조건은 무엇인가? 각성은 그저 ‘파워업’만을 수반하는가? 보통의 ‘파워업’과 ‘각성’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이 글에서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를 “인간이 궁극적 실재와 합일되는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의식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통해 체험을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체험을 통해 얻어진 통찰에 기초해 궁극적 실재와 우주, 그리고 인간의 통합적 관계를 설명하는 사상으로 구성된 종교 전통”으로서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각성’ 개념을 받아들이고,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각성 서사인 “레퀴엠”이라는 이름의 체험을 종교적으로, 내지는 신비주의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윌리엄 제임스가 천명한 종교체험의 네 가지 특성 가운데 수동성(passivity)에 초점을 맞추어, 레퀴엠 체험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엄청나게 많은 소년만화들 가운데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일본 미디어 예술 100선에서 2위를 차지했을 만큼 일본 소년만화, 그중에서도 이른바 “능력자 배틀물”의 전형(cliché)을 정립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 대한 신비주의적 분석이 이후 또 소년만화에서의 각성 서사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인식의 틀이 되기를 기대한다.
II. 스탠드, 종교체험, 레퀴엠
“죠죠의 기묘한 모험”은 각 부마다 서로 다른 ‘죠죠’라고 불리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만화에서는 ‘스탠드’라는 이름의 일종의 초능력이 등장한다. 스탠드는 인간의 영적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초능력의 형태로 실체화된 것으로, 작중에서 ‘스탠드’ 유저는 마찬가지로 불을 뿜거나, 시간을 멈추거나, 상처를 치유하는 등 비범한 능력을 발휘한다. 작중에서 표현하는 스탠드의 고유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스탠드'란 그 사람을 지켜주는 수호령과도 같은 존재다.
'스탠드'는 한 사람에게 하나뿐이다.
'스탠드'를 자유로이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스탠드 유저'다.
'스탠드'가 상처입으면 스탠드 유저도 상처를 입는다.
'스탠드'는 스탠드로만 쓰러뜨릴 수 있다.
'스탠드'란 '곁에 서 있다 (Stand by me)'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스탠드'란 기본적으로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다.
위와 같은 서술에 따르면, 스탠드는 슐라이어마허와 제임스가 주장하는 종교의 핵심인 “개인이 보이지 않는 차원과 형성하는 관계”라는 수사에 일정 부분 부합한다. 따라서 스탠드 자체가 종교체험을 매개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만화에서는 이 스탠드가 각성한 것으로서, “레퀴엠”이라는 이름의 각성 형태가 등장한다. 레퀴엠을 위해서는, 스탠드가 특수한 화살에 찔리는 경험을 통해 각성해야 한다. 레퀴엠의 힘은, 작품에 따르면 생물의 혼을 지배하는 것, 나아가 세계 전체에 관여하는 것이다. 작품에 따르면 레퀴엠 주변의 “45억년 걸쳐 만들어진 생물의 역사가 아주 잠깐 사이에 다른 것으로” 변해간다. 또한 레퀴엠 각성 이후 주인공은 ‘진리’ 그 자체에 접속한 듯한 태도로 레퀴엠 체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도 레퀴엠의 능력이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어...녀석은 이미 그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어. 특히 녀석이 『진실』에 도달할 일은 결코.. 『죽음』이라는 진실조차도 얻을 수 없어..『무한히』.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게 『끝』. 그것이 『골드 익스피리언스 레퀴엠』
위 대사는 5부의 주인공 ‘죠르노 죠바나’가 레퀴엠 각성 직후 악당 ‘디아볼로’를 제압한 후에 남긴 대사이다. 이 묘사에 따르면 주인공은 뭔가 깨달았고, 자신조차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초월적인 힘으로써 악당을 물리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골드 익스피리언스 레퀴엠’이 각성 이전의 스탠드인 ‘골드 익스피리언스’의 안쪽에서 알을 깨듯 나오는 연출 등은, 본래의 얼굴을 가르고 에까다사무카(Ekādaśamukha)로 ‘각성’하는 보지 스님(宝誌和尚)의 불상을 연상케 한다.
재미있는 점은 레퀴엠 각성의 방아쇠가 바로 ‘화살에 찔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작중 주인공은 레퀴엠 각성을 위해 스스로 자기 가슴에 화살촉을 꽂아 넣는다. 이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신비체험과 매우 의미심장한 유사성을 갖는데, 데레사 또한 자신의 자서전에서 신비체험의 경험을 “화살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를 묘사한 조각품,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성녀 데레사의 법열’에서도 천사는 화살을 들고 있다.
이처럼 레퀴엠의 특성은 분명 신비주의적으로 의미심장하지만, 특별히 근거를 들어 논증할 수는 없다. 실로 레퀴엠이 신비적 합일 체험인지도, 화살에 찔리는 일이 아빌라의 데레사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만화에서는 레퀴엠 체험의 질적 내용(qualia)에 대해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작품 안에서 상세히 묘사되는 각성의 조건을 신비주의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각성으로서의 레퀴엠에 대해 보다 더 상세한 분석이 가능할 것 같다.
III. 각성의 조건과 수동성
제임스는 종교체험은 체험자가 원한다고 해서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체험을 원치 않거나 별다르게 생각이 없다가도 종교체험이 주어지는 것도 종교체험이 수동적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대표적으로 세속적 신비주의에서의 종교체험, 혹은 훈련되지 않은(untrained) 신비체험이 바로 그 사례일 수 있다. 위와 같은 견지에서 만화의 레퀴엠 체험을 들여다보자.
각성 체험이 등장하는 여러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원래 가진 힘을 갑자기 눈 떴다’라는 식으로 각성 체험의 조건에 대해 불명확하게 서술하기도 하는 한편, 본 만화에서는 각성 체험을 위한 조건을 비교적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스탠드가 레퀴엠으로 각성하는 조건은 앞서 언급했듯 특수한 화살에 찔리는 일이다. 그런데 모든 화살에 찔린 스탠드가 레퀴엠으로 각성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는 “화살이 화살을 지배할 자를 고른다”와 같은 언명을 통해, 레퀴엠 각성 체험의 수동성을 적시한다.
이 언명만으로도 레퀴엠 각성의 수동성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지만, 작중에서 레퀴엠 각성을 시도하거나 체험한 인물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레퀴엠 각성의 수동성은 더 상세히 드러난다. 작품 전체에서 ‘화살에 찔리는 일’을 경험하거나, 시도한 인물은 총 세 명이다. 주인공인 ‘죠르노’, 메인 빌런인 ‘디아볼로’ 그리고 조력자인 ‘폴나레프’.
죠르노는 총 두 차례 화살에 찔리는데, 첫 번째에 ‘레퀴엠’의 존재를 몰랐을 때 한 번, 디아볼로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화살을 가슴에 박아넣음으로써 또 한 번 찔린다. 죠르노가 레퀴엠에 각성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두 번째 경우에서였다. 한편, 디아볼로도 작중 레퀴엠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되고, 레퀴엠 각성을 시도하기 위해 스스로 스탠드에 화살을 찌른다. 그런데 화살은 디아볼로의 스탠드에 닿지 않고 지나가버린다. 그야말로 “화살이 화살을 지배할 자를 고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레퀴엠 각성이 수동적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죠르노가 어떻게든 레퀴엠 각성에 성공한 것은 ‘화살’에 선택받은 것이라고는 하나, 죠르노가 그 스스로 가슴에 화살을 박아 넣은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레퀴엠 각성은 어느 정도 능동적(voluntary)인 것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다. 작중 조력자로 등장하는 폴나레프는, 작품 전체에서 처음으로 레퀴엠을 각성한다. 폴나레프가 레퀴엠을 각성한 계기는 그저 우연이었다. 폴나레프는 당시에만 해도 레퀴엠 각성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선반 사이에 떨어뜨린 화살을 주우려다 우연히 화살에 찔리는 경험을 하고, 스탠드가 레퀴엠으로 각성하는 체험을 한 뒤, 폴나레프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저 화살을 완전히 지배하는 자가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 화살이 얼마나 옛날에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살을 만든 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만했다!”
그리고 폴나레프는 이 경험을 작중 죠르노 일행에게 말함으로써, 레퀴엠 각성의 존재와 그 조건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레퀴엠 체험은 특별히 의도적인 훈련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기도 하는 자발적인(spontaneous)인 체험이다.
폴나레프의 레퀴엠 각성 사례를 고려하면 레퀴엠 각성은 스탠드 유저의 의사와는 별로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레퀴엠을 각성하겠다는 의사로 스탠드에 화살을 찌른 결과 각성에 성공한 죠르노, 각성하겠다는 의사로 화살을 찔렀지만 각성하지 못한 디아볼로, 그리고 각성하겠다는 의사 없이, 심지어는 레퀴엠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우연히 화살에 찔려 각성하게 된 폴나레프. 이들의 공통점은 ‘화살에 찔리는 일’을 시도하거나 경험했다는 것뿐이다. 실상 레퀴엠의 각성은 이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일어난다.
또, 레퀴엠 각성은 스탠드 유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어날 뿐 아니라, 스탠드 유저의 역량과도 무관하게 일어난다는 점에서 수동성이다. 앞서 스탠드의 역량은 스탠드 유저의 영혼/신체와 밀접하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작중 레퀴엠 각성 이전 폴나레프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스탠드 능력이 매우 저하되어 있었다. 선반 사이에 떨어진 화살을 직접 줍지 못하고 스탠드로 주운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다. “힘이 있는 자가 화살을 쓰면 그 자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는 힘(레퀴엠)을 얻게 된다”는 작품의 서술과는 달리, 폴나레프의 영적/신체적 ‘힘’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그렇지만 폴나레프는 상기한 대로 레퀴엠 체험을 하게 된다. 이는 작중 사실상 가장 강력한 스탠드 파워를 가지고 있던 디아볼로가 각성에 실패한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즉, 폴나레프의 레퀴엠 각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레퀴엠 체험은, 각성의 트리거인 ‘화살에 찔리는 일’만 충족된다면, 각성에 대한 개인의 의지/훈련/역량과는 무관하게 스탠드 유저에게 주어진다.
폴나레프의 각성은 낮은 역량 상태에서의 각성 체험의 위험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폴나레프는 레퀴엠을 각성하는 데 성공하나, 각성 이후의 스탠드를 제어하는 데 실패한다. 즉 각성 후 스탠드가 폭주한 것이다. 폴나레프의 각성한 스탠드가 제어를 잃고 날뛰는 사람에, 작중 죠르노 일행과 디아볼로 모두 곤란한 상황에 이른다. 이는 신비적 의식 상태의 인물이 “간질병 환자에게는 공격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보고한 브라운의 보고를 연상케 한다. 즉, 각성 이후의 파워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각성은, 외려 자기나 가까운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등,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한 현상은 우리가 그 현상을 보게 되는 맥락에 따라 경탄의 대상도 되고, 두려움의 대상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IV. 마치며- 각성, 양날의 검. 그리고 또 다른 질문들
나는 이 글에서 소년만화에서의 각성 서사가 신비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여지에서 착안하여,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의 레퀴엠 각성을 신비체험의 수동성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레퀴엠 각성을 ‘화살에 찔리는 일’을 트리거로 하는, 이른바 수동적인 종교체험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레퀴엠은 스탠드 유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발현한다. 둘째, 레퀴엠은 스탠드 유저가 레퀴엠을 사전에 알지 못하거나, 훈련되지 않았더라도 발현한다. 셋째, 레퀴엠은 각성 이후 스탠드 유저가 스탠드를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와 무관하게 발현한다. 역량이 없는 자에게 발현한 레퀴엠의 폭주 가능성, 그리고 사악한 자에게 레퀴엠이 각성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레퀴엠 각성은 그 존재 자체가 양날의 검이다. 그래서 작중 폴나레프는 말한다. “화살은 적이 아니다! 하지만 아군도 아니다!....(중략) 화살은 ‘희망’이다!”
이처럼 각성의 수동성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나면, 의외로 각성의 위험성이 발견된다. 이는 다시금 종교체험이 개인에게 마냥 지적, 윤리적 완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각성은 신비체험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이 글에서와 같이 각성의 특성과 조건에 대한 부분적인 해명은 또 다른 후속적인 질문들을 야기한다. 각성의 유형론(typology)는 어떤 기준에 의해 분류할 수 있는가? 각성이 통제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존재의 본성 등 신비주의와 무관한 각성은 불가한가? 등등. 이렇듯 만화의 독자라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각성 서사는 의외로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에 얽혀 있다. 마치 끝없이 변모해가는 만화경의 한 풍광과 같이.
<참고 문헌>
아라키 히로히코, “죠죠의 기묘한 모험: 황금의 바람”
아라키 히로히코, “죠죠의 기묘한 모험: 스타더스트 크루세이더즈”
성해영, ‘신비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간화선(看話禪)- 종교체험과 수행 개념을 중심으로’ 선학, 36, 2013.
성해영,‘깨달음 체험과 완성의 의미 : 아빌라 데레사의 『내면의 성(城)』을 중심으로’
성해영,‘무종교의 종교(Religion of no Religion)’ 개념과 새로운 종교성: 세속적 신비주의와 심층심리학의 만남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제 32호,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17.
성해영, ‘신비주의와 윤리의 상호 관계 : 미국 종교학계의 논쟁을 중심으로’,“종교와 문화”,제29호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15.
윌리엄 제임스, 『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 중 ‘신비주의’ (김성민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THE LIFE, OF ST. TERESA OF JESUS, OF THE ORDER OF OUR LADY OF CARMEL.
WRITTKN BY HERSELF.”TRANSLATED FROM THE SPANISH BY DAVID LEWIS.
보지 스님(宝誌和尚)에 관한 교토국립박물관 설명:
https://www.kyohaku.go.jp/old/jp/theme/floor1_2/f1_2_koremade/1F-1_20210202.html
日本のメディア芸術100選 マンガ部門, 2006. (web: https://kurashidata.com/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