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 스토리4 》의 실존주의적 해석
개봉한지 한참이나 된 토이 스토리4를 연말에 집에서 보았다. 막상 개봉할 때는 시간이 없니 뭐니 하면서 미루고 미루던 시리즈의 끝을 iptv를 여행하다 만난 것이다.
작품의 서사는 우디의 새 주인인 보니가 유치원을 가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디의 전 주인이었던 앤디와 달리 여자아이인 보니는 구닥다리 카우보이 인형은 잘 가지고 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디는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장난감의 숙명이라며, 보니의 유치원에 따라가 보니가 유치원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 때 우디가 쓰레기통에서 적당히 던져준 플라스틱 포크, 철사, 봉제인형 눈 따위로 만든 '포키'가 탄생한다. 포키는 갑자기 쓰레기에서 장난감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에 적잖이 당황한다. '나는 쓰레기야. 장난감이 아니라고'라고 말하며, 보니의 장난감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스스로 원래 있던 자리인 쓰레기통으로 가려고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쓰레기로 인지한다. 이에 주인공 우디는 말한다. '네 나무 막대로 되어있는 발바닥에 보니의 이름이 적혀있고, 보니가 널 아끼는 한 넌 쓰레기가 아니다.'라고.
어찌어찌 서사가 진행되면서 우디와 포키가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는 계기가 생긴다. 포키는 말한다. 쓰레기통 속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곳이라고. 우디는 포키에게 '그게 바로 보니가 너한테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며 설득한다. 이에 포키는 '보니에게 나는 (장난감이 아니라) 쓰레기였어!' 라고 말하며 굉장히 기뻐하며 우디를 따라 보니에게 가기로 한다.
그리고 우디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고, 자신의 존재가 쓸모없음을 토로한다. 자신은 사명을 다했고, 쓸모가 없어졌다고 포키에게 말한다. 더 이상 장난감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회의를 느끼며, 보니를 찾아 포키와 함께 떠난다.
이 장면은 작품에서는 유머요소로 드러나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장난감이고 무엇이 쓰레기인가, 왜 장난감은 주인에게 헌신하는가 등등의 많은 주제의식이 교차한다. 포키는 쓰레기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주인이 아끼는 순간 쓰레기가 아닌 장난감이 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초반부부터 옷장에서 꺼내지지 않는 우디는, 자신이 아낌받지 못하는 걸 깨닫고 장난감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그러고는 포키와의 대화 끝에, '그럼 나는 쓰레기인 것인가?'라는 자기 의문에 다다른다. 그리고 이 찜찜함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작품은 진행된다. 버려진 장난감이 되었지만 버려짐을 부정하고, 주인에게 헌신하기 위해 포키를 보니에게 데려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우디의 이 자기 질문은 종국에 가서야 해소된다. 버려진 장난감이지만 그들 나름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장난감들을 보며, 자유로운 행동 주체로서 활약하는 과거의 연인 '보 핍'을 만나게 되면서. 영화의 결말은 결국 포키를 보니에게 데려다 주고, 우디 자신은 버려진 장난감으로서 남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 쓰레기였던 포키는 보니의 장난감이 되었고, 장난감이었던 우디는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버려진 장난감(쓰레기)이 된다. '쓸모 없어진 나는 쓰레기인 것인가?'라는 자기질문에, 우디는 여기서 '자유'를 인식하고 '주인없는 장난감'이 되기로 주체적인 선택을 내린다.
이 작품에서 '쓰레기' 와 '장난감'은 대척점에 있는 키워드이다. 쓰레기는 쓸모없는 것이며, 주인이 없고, 목적도 없이 쓰레기통에 있는 것이 그 존재 이유이다. 장난감은 주인을 아껴주고, 주인에게 아낌받으며, 주인을 위해 헌신하는 목적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작품에선 제 3지대의 인물(?)들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장난감이지만, 주인이 없는 장난감들이다. 이들은 이 이분법적 구도에서 놓고 보면 쓰레기로 분류해야 한다.
그러나, 포키가 쓰레기통에서 생명을 얻기 전에는 아무 주체가 없었듯이, 쓰레기통에서 생명을 얻고 나서도 스스로를 '보니의 장난감'이라고 인식하기 전에는 맹목적으로 쓰레기통에 달려갔듯이. 쓰레기는 맹목적인 존재다. 하지만 주인 없는 장난감들은 맹목적이지 않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 있으며, 자유를 갈구하고, 새 주인을 원하기도 하면서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도 toy story는 유효한 것이다. 주인 없는 장난감들은 쓸모는 없을지언정 쓰레기는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존재 의의에 대해 계속 고민한다. 이 고민의 과정 자체가 바로 자유인 것이다.
이전 시리즈의 토이 스토리에서도 '주인 잃은 장난감' '버려진 장난감' 등, 목적을 잃은 장난감은 비중 있게 등장해왔다. 당장 토이 스토리3의 서사도 앤디가 장난감을 처분하면서 시작되고, 각 시리즈의 '메인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은 다들 '장난감을 주인으로부터 떨어뜨리게 하는' 역할을 해온 것을 감안하면 더욱 명확하다. 그러나 이전 작품에서, 그리고 본 작에서의 중반부까지의 서사가 그랬듯, 모든 장난감들은 자신의 역할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당시에는 유아적이고 극적인 장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은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들이다.
실존주의의 유명한 말엔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에 앞선다'라는 말이 있다. 허나 이는 인간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이고, 장난감이라는 물건을 놓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정 반대다. 장난감은 주인과 함께한다는 본질이 있고서라야 실존한다. 마치 포키가 보니에게 만들어지고, 이름을 부여받자 비로소 생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중반부까지 계속해서 주인공 우디에게 어떤 현실을 직시시킨다. 자신은 이미 본질을 잃었다는 현실을 말이다. 그러나 우디는 이에 저항하며, 계속 보니 곁에서 주인을 보살피고 싶어한다. 그 방법론이 우디에게는 '사라진 포키를 찾는 것'인 셈이다. 설사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보니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인 포키를 찾아옴으로써 자신은 '주인을 보살핌' 이라는 소기의 본질을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내내 '아니, 포키를 찾아와 봐야 어차피 본인은 인정받지도 못할 텐데 왜 저렇게 집착하지?'라는 생각을 했다면, 당신은 어떤 목적도 없이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존주의에는 피투성被投成(been thrown)이라는 말도 있다. 인간은 목적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본질도 없이, 살아갈 이유조차 없다. 단지 태어나보니 주체를 가지고, 선택할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들은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것'- 즉 선택하는 것-에 집중한다. 인간은 장난감과 달리 만들어진 목적이 있는 것이 이니므로, 주체적으로 선택을 해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장난감이 있다. 이 장난감은 피투성의 존재는 아니다. 주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만들어져, 주체를 얻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본질을 잃고, 쓸모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이 장난감은 쓰레기인 것인가? 쓰레기통 안의 삶에서 만족하는 쓰레기나 다름 없는 것인가? 결론은,(실존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쓸모를 잃은 장난감들은, 본질을 잃었지만 자아를 잃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디를 비롯해서 작품은 많은 주인 없는 장난감들은 방황하는 것이다. 그 방황의 방법은 우디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작품의 메인빌런격인 '개비개비'처럼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수도 있다. 주인에게 사랑받음으로써 자아가 생겼듯, 주인을 잃으면 자아를 잃는다는 설정이었다면 이런 방황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 핍의 등장으로 이 방황이 해소되어야 할 방향성이 드러난다. 장난감들에게 주인을 보살핀다는 것은 그 본질이며, 생명의 목적이며, 숭고한 일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다하고 나서, 자아만 남은 상태로 세상에 던져졌다면 그 장난감은 피투성의 존재이다. 이 장난감에겐 이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능력이 있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장난감이지만 더이상 장난감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실존주의적 자아의 완성을 이룬 캐릭터들이 바로 골동품점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장난감들이다. 이 장난감들은 쓸모를 잃었지만 쓰레기가 아니다. 자아를 갖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의 최후반부에, 다른 장난감들이 '그럼 우디는 버려진 장난감이 된 것이냐'고 버즈에게 묻는 장면에서, 버즈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며, 'To infinity, and beyond' 라는 말을 남긴다. 즉 우디는 자신의 삶을 무한성에 던진 것이다. 무한한 선택지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도록, 우디는 기꺼이 기투己投 한 것이다.
실존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토이 스토리의 끝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였던 셈이다. 목적을 갖고 태어나, 목적을 잃었으나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주인공이라는 서사로 말이다. 이 서사의 과정에서, 본래 쓰레기였던 포키가 본래부터 장난감이었던 다른 장난감들보다 더 사랑을 받는 등의 아이러니도 영화의 재미를 거든다.
추가로 재미있는 것은, 우디의 삶은 니체가 주장하는 삶의 3단계와 굉장히 밀접하다는 것이다. 우디는 장난감으로서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당나귀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다 자신의 본질을 잃고, 그 본질을 되찾기 위해, 혹은 본질을 아직 잃지 않았음을 거부하며 사자의 삶을 산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자유를 직시하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창출하는 어린아이(초인)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누군가는 토이스토리4의 엔딩을 '새드엔딩'이라고 부르겠지만, 니체라면 기립박수라도 치면서 '최고의 해피엔딩'이라고 극찬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