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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l 03. 2023

공존이란 무엇인가?

영화 《엘리멘탈》을 보고.

*영화 "엘리멘탈"(2023)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엘리멘탈"의 극장 홍보 이미지

이질적인 이와의 공존은 실로 어렵다

 

인간의 삶에서 반드시 겪게 되는 난제 가운데 하나는, 이질적인 타인과의 공존이다. 공존에는 대개 시간과 노력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들과 함께 존재하는 일에 비해, 동질적인 것들 하고만 함께 존재하는 일은 쉽다. 가령 중국집에 간다면, 짜장면에 죽고 못 사는 짜장면 애호가들은 짜장면 애호가들끼리만 중국집에 가는 편이 여러 측면에서 편하다. 어차피 짜장면을 시킬 것이기에 의사결정이 쉽다. 의사결정이 쉬우므로 짜장면으로 만장일치일 테니 의견 취합이 쉽다. 의견 취합이 쉽기 때문에 주문하기가 쉽다. "여기 짜장면 열 그릇요!" 게다가 조리를 하는 입장에서도 쉽다. 한 냄비에 짜장면 10인분을 볶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짜장면, 짬뽕, 탕수육, 팔보채 등의 애호가가 두루 섞여있는 이들이 중국집에서 밥을 먹는 일은 쉽지 않다. 먼저 의사결정이 어렵다.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볶음밥을 먹을지,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가 될지 각자 고민해야 한다. 그다음엔 의견 취합이 어렵다. 누구는 짬뽕을 먹고 누구는 짜장면을 먹는지 일일이 물어봐야 하고, 사람이 많다면 그것들을 받아 적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의견 취합을 하더라도 주문이 어렵다. "여기 짜장면 한 그릇 하고요, 짬뽕 두 그릇, 마라탕 두 그릇, 여기서 하나는 맵게 해주시구요.." 간신히 주문을 하더라도 조리하기가 어렵다. 조리하기가 어려우므로 음식이 나오기까지 대기시간이 길어진다. 어떤 이들은 배고픈 나머지 책상을 당수로 내리칠지도 모른다.


 이뿐만이랴. 게다가 일견 동질적으로 보이는 이들 가운데서도 공존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간짜장이 좋냐 삼선짜장이 좋냐로 언쟁이 벌어지기 쉽다. 간짜장을 좋아하는 사람들 간에서도 삶은 달걀이냐 계란 후라이냐로 언쟁이 벌어지기 쉽다. 그리고 기나긴 언쟁 끝에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 채 식사를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중국집에서 밥을 먹는 상황에서조차도 공존의 문제란 이렇게 복잡 다난할진대, 현실 정치에서의 공존의 문제는 물론 이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다. 무엇보다도 현실 정치에서 공존의 문제란 곧 생존의 문제로 이어진다. 현실 정치에서 공존에 실패하면 누군가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불만스러운 기분으로 식사를 시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다음으로 현실 정치에서 공존의 문제는 한정된 자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10명이 각각 다른 10개의 메뉴를 주문한다면 주방장이 좀 고생할 뿐이지만, 현실에서 수천만 명의 시민들의 기호를 맞추는 건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실로 완전한 공존을 이루는 공동체란 불가능에 한없이 가까워 보이기에, 어떤 이들은 완전한 공존 대신 나름의 구분짓기를 시도한다. 구분짓기를 위한 기준은 설정하기 나름이다. 인종/나이/재력/국경/종교 등등. 이 구분짓기의 현상이 꼭 사회에 악영향만을 끼치는 건 아니다. "논어"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仁을 돕는다"고.(君子以文會友;以友輔仁)


이질적인 이들과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도대체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2023년 영화 "엘리멘탈"은 이 주제에 대한 문답이다. 불꽃 원소인 '앰버'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는 네 가지 원소(물, 불, 흙, 공기)가 거주하는 도시 '엘리멘트 시티'를 그려낸다. 본래 물, 흙, 공기가 공존하며 살던 이 도시에 앰버의 부모 '버니'와 '신더'가 이주해 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엘리멘트 시티는 불꽃 원소들과 안정적으로 공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 이유는 바로 불꽃의 속성 때문이다. 불은, 폭발하고 태우고 녹이는, 바로 그 성질 때문에 사실상 다른 원소들로부터 꺼려진다. 다른 원소들이 보기에 불은 언제든 자기들이 세워둔 문명을 파괴할 잠재적인 방화범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 원소 입장에서도 다른 원소들과 어울려 특별히 좋을 게 없다. 흙 원소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태워버릴 수 있는 건 사실이기도 하니까. 특히 물에 잘못 닿았다가는 비명횡사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불 원소들은 엘리멘트 시티에 이주해 와서도 작은 지역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작품은 불 원소 앰버와 물 원소 웨이드 사이의 사랑을 통해, 서로를 죽일 수도 있는 두 이질적 주체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에는, 불 원소로만 가득했던 앰버의 가게는 물, 불, 흙, 공기 원소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다음의 난제와도 같은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이질적인 주체들과의 공존은 가능한가?


 공존의 순간은 기적적으로 일어난다


 작품에서 웨이드와 앰버가 사건이 진행되며 가까워지면서도, 서로를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작품의 중반부가 지나서였다. 물과 불이 실은 서로 닿을 수 있는 것이었다니! 실로 기적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라이덴프로스트 현상으로 인해 불과 물이 닿기 직전에 얇은 수증기 막이 형성되면서 서로가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불 원소들은 한 번도 물 원소와 접촉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에,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


 이와 비슷한 기적적인 순간이 또 있으니. 바로 물로써 불을 붙이는 순간이다. 앰버의 어머니 '신더'는, 불과는 섞일 수 없는 물 원소인 웨이드의 퇴짜를 놓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향초에 불을 붙여보라고, 그러면 점성가인 자기가 연애운을 봐 주겠다고. 웨이드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몸을 볼록렌즈와 같이 만들어 앰버의 불빛으로 향초에 불씨를 틔워낸다. 물은 불을 피워낼 수 없으리라는 우리의 편견에 웨이드는 과학적 사실로써 우리 뒤통수를 휘갈긴다.


 기적의 순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 작품의 최후반부에 웨이드는 밀폐된 공간에 앰버와 갇히게 되면서, 몸이 끓고 증발하게 된다. 밖에는 물바다, 웨이드나 앰버는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다. 영화는 눈물을 핑 자아내는 연출과 함께, 웨이드가 앰버를 위해 희생하는 듯한 상황의 그려낸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깐, 앰버가 숨겨온 진심을 이야기하자 수증기 상태였던 웨이드가 눈물을 흘리고 다시 물이 되면서 기적이 일어난다.


  그냥 과학적인 사실을 발견해 낸 것뿐인데 이게 무슨 기적이냐고? 당연한 사실일 뿐이라고? 기적이란 무엇인가. 뜻밖의 순간에 일어나는 당연한 일, 그것이야말로 기적 아니겠는가. 예수는 당연하다는 듯,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였다. 기적을 행하면서 '후덜덜, 내가 기적을 행하는 중이군'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기적이란 우리의 기존의 인식을 깨부수지만, 실은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일 때 일어난다. 기적이 일어난 순간,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며, 기적이 끝난 뒤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유레카!'의 순간이야말로 기적적인 순간이다.


 그리고 공존의 가능성은 기적의 순간에 열린다. 물과 불은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 물은 불을 붙일 수 없을 거라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 물과 불이 밀착해 있으면 둘 중 하나는 사라지고 말 거라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 바로 그 해묵은 편견이 깨지고, 서로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이 순간에 바로 공존이라는 기적이 일어난다. 서로 이질적인 문화와 생김새를 전유하는 주체일지라도 공존할 수 있다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리를 발견하게 되니까.


 공존의 노력과 수혜는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상호적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우리가 공존 가능하겠다!' 하는 깨달음의 체험만으로 진정한, 그리고 완숙한 공존이 가능할까? 그럴 리가. 그랬다면 애당초 '저들과는 공존하기 어렵겠군' 하는 케케묵은 편견도 생기지 않았을 거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공존의 가능성을 깨닫는 것만큼이나 공존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일까.


 공존을 위한 노력 운운하면 이른바 다수자들이 툴툴거리면서 말한다. "그건 자기들 사정이고!" 특히 채식주의, 성소수자, 동물권, 장애인, 환경보호 등의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슬로건을 내놓으면 더더욱. 누가 자기들 사정 아니랬나? 그들의 사정이기에 그들과의 공존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채식주의자와의 공존을 위해서는, 나 같은 보통의 잡식주의자들의, 회식 장소를 고깃집이 아닌 곳으로 정하는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성소수자들과의 공존을 위해, 나 같은 이성애자들의, 사랑고백을 받거든 정중히 거절하는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실로 공존을 위한 노력이란 얼마나 일방적인가! 소위 일반인이 얼마나 배려해야 하는가! 영화에서 웨이드의 가족은 불 원소인 앰버가 집에 찾아왔을 때, 앰버에게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앰버에게 물속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불이 자기들 집안을 태워먹지는 않을까 하는 편견 어린 시각으로 앰버를 보지도 않는다. 앰버의 가게를 찾은 웨이드에게 불 원소만의 뜨거운 음식을 강요한 버니의 태도와는 아주 딴판이다.  물 원소가 불 원소를 위하는 배려는 거의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물 원소의 배려 없이 물과 불이 공존하려고 들었다간 불 원소는 말 그대로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 원소가 제멋대로 굴어도 물 원소를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 없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시 말해, 공존을 위한 노력이나 배려가 일방적인 이유는, 공존의 장애물이 되는 바로 그 속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성은 공존의 대상이 갖는 본질이다. 고기를 먹는 채식주의자는 더 이상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듯, 물에 빠져 꺼져버린 불은 더 이상 불이 아니다. 따라서 불이 불이게끔 하는 데에는, 누군가의 일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공존을 위한 배려는 마냥 일방적인가? 소위 일반인들이 기꺼이 불편함을 감내해야 하는가? 이른바 소수자들의 노력과 배려는 불필요한가? 공존으로 인한 혜택은 배려된 소수자들만이 전유하는가? 그럴 리가.


 공존을 위한 노력이 마냥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 원소가 배척된 데에는, 그들이 애당초 내재하고 있는 파괴성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불은 다른 원소를 파괴할 수 없는 반면, 물에 의해 간단히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은, 불 원소가 갖는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는 도시화된 인간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도시를 건설하고 재생산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도시의 법규에 굴종하지 않으면 파괴되는 유약함을 가진 것도 인간이다. 마찬가지로 불 원소와 공존하게 될 엘리멘트 시티에서는. 불 원소는 파괴성을 잘 제어하고 자기가 문명의 파괴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공존을 통해 불 원소가 얻는 수혜에 대한 노력이다.  


 게다가 도시와의 공존을 통해 수혜를 얻는 것이 꼭 불 원소만은 아니다. 영화가 전개되며 불 원소의 능력이 유리공예에 활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유리는 도시의 건축물과 예술에 활용되므로, 유리공예 능력의 가치는 실로 대단했다. 파괴만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불 원소의 속성이 실은 도시에 공헌할 수 있는 결정적인 능력이라니! 이렇게 공존을 통해 얻는 수혜는 공동체 전체가 전유하게 된다. 이렇듯, 공존을 위한 배려와 혜택은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상호적인 것이 된다.



 영화 밖에서, 기적을 기다리며


 그러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현실에서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물을 좀 뿌린다고 그를 죽일 수 없으며, 그 또한 죽음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찬찬히 뜯어봐도 공동체에 한 줌 기여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놈들도 많다. 해악이나 안 끼쳤으면 좋겠다. 이들과 공존이란 도대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글로써 벗을 모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혹시 아는가. 물이 불을 피우고, 불과 물이 만나며, 흩어진 공기가 다시 물이 되는 기적의 순간이 우리의 공동체에도 찾아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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