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준 Jun 18. 2023

연애란 무엇인가?

우리의 연애는 진즉 끝났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연애는 진즉 끝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애란 무엇인가? 연애를 시작하는 데 있어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보통은 던지지 않는다고? 그렇겠지.


 뭔가에 매진하는 것과, 그것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윤곽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전혀 별개의 변수이다. 예컨대 수능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라. "수능이란 무엇인가?" 이에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는 수험생이란 극히 드물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매진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정체성을 되묻는 일은 중요하다. 수능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수능에 매진하는 고등학생, 연애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연애에 매진하는 연인,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스스로 정의를 심판한다고 생각하는 법관. 이들의 공통점은, 어떤 대상에 열심히 매진하다가도 불현듯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될 공산이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른바 "현타"(현자타임)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 혹은 정체성에 대한 재고의 경험 없이는, 기존의 자기와의 괴리가 발생하게 된다. 그저 자동적으로 행동하던 과거와는 달리, 습관적으로 행하던 행동 하나하나가 이상하게만 느껴지고, 그래서 매 행동의 순간에 실존적인 결단을 감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잘 연애하다가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얘를 더이상 좋아하긴 하나?" "이 연애를 지속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얘를 계속 만날 이유가 있나?" 등.


 그러나 삶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곧 죽음의 이유가 되지 않듯, 죽음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곧 삶의 이유가 되지 않듯, 연애를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곧 연애를 끝낼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행동의 정체성이나 목적이 사라졌다고 해서 행동의 의미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 하는 물음은 말 그대로 상대의 안녕寧여부가 궁금해서 하는 물음이라기 보다는, 마주친 상대방에게 관습적으로 하는 행위에 가깝다. 술자리에서의 건배도 마찬가지다. 건배의 유래는 다양하다지만, 가설 가운데 하나는 서로의 술잔을 부딪혀 술에 독이 들어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건배(乾杯

)는 술에 독이 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도, 잔(杯)을 완전히 비우는 일(乾)도 아니다.




 이런 관습적인 일에 하나하나 시비를 걸어가며 "안녕한지 궁금하지도 않은데 왜 '안녕하세요' 하고 물어요?" "왜 잔을 비우지도 않는데 '건배'라고 말해요?" 하고 묻는다면 주변에서는 '이 녀석 돌아이가 분명하군' 하는 눈초리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할 것이다. 


 연애의 "현타" 순간에 있는 누군가는 다시 이렇게 쏘아붙이며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럼, 연애가 관습으로서의 인사나 건배 같은 거란 말이에욧?" 글쎄, 아닐까? 연애가 관습으로서의 인사나 건배와는 달라 보이는 건, 연애는 분명히 엄청나게 강력한 감정적인 몰입 혹은 헌신을 요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하며 열혈 넘치게 인사하는 사람은 드물다. "건배!"하고 외치며 상대의 눈동자에 풍덩 하고 빠질 것만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드물다. 그리고 연애에 수반하는 몰입, 내지는 헌신을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랑이라고 과연 관습의 풍화 아래에서 자유로울 리가.




 아침에 부서지는 햇살 아래에서 애인의 뱃살을 조물락거리며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나는 더이상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아." 이 말을 들은 그/녀의 눈과 코에서는 눈/콧물이 질질 흐를지도 모른다. 그 눈/콧물에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덧붙인다고 상상해보라. "그렇지만 여전히 당신 옆에 있을테고, 당신과 맛있는 점심을 먹을 테고, 저녁에는 당신과 맥주를 마실테고, 이런 하루하루를 매일매일 반복하고 싶어." 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아마 질질 흐르던 눈/콧물을 닦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개헛소리야"


 연애가 너무 편안해졌는가? 더 이상 상대를 만나는 게 설레지 않은가? 불현듯 연애란 되묻고 싶어지는가? 연애의 "현타" 순간에 도달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어쩌면 우리의 연애는 진즉 끝났는지도 모르겠노라고. 어쩌면 이미 안녕을 묻지 않는 '안녕' 처럼, 잔을 비우지 않는 '건배'처럼, 그 정체성과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관습으로서의 연애만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네가 안녕한지는 궁금하지 않지만, 안녕하니?" "잔을 비우지도 않을 테고 술에 독이 들었는지 묻지 않겠지만, 건배!" 따위의 말을 하지 않듯, "난 널 사랑하지 않지만 연애를 지속하겠어"라는 말도 이상한 말로 비춰질 것이다. 실상 우리의 연애를 지속하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사랑해"는, 연애의 시작 단계에서 서로가 합의한 사랑의 정체성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의 연애는 진즉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껏 쌓아온 시간들이, 추억들이, 사랑이 슝 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연애'라는 말로써 지시하고자 하는 정확한 대상은 다를지라도, 여전히 서로가 '연애'라는 공유된 표현으로 공유된 관습 하에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서지는 달빛 아래에서 애인의 뱃살을 조물락거리며 이렇게 말하자.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당신 옆에 있을테고, 당신과 맛있는 야식을 먹을테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와인을 마실테고, 그런 하루하루를 매일매일 반복하고 싶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 사랑해" 연애란 무엇인지 되물어본다면 새삼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연애'의 이름으로 붙들어놓은, 연애가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사실을. 


이전 08화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