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타령
언제부터인지, 자존감(自尊感, self-esteem)은 행복의 필수조건 가운데 하나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자존감 높은 사람들의 특징"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연애하세요" 운운하는 컨텐츠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존감 높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이제 어떤 사람에 대한 극찬이 되었다. "자존감이 낮다" 라는 식의 평가는, 그 사람을 맛이 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할 때나 쓰인다.
나는 미국 심리학계에서 자존감을 어떻게 연구하는지, 그리고 자존감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학술 용어로서의 '자존감' 보다는 오히려 세간에서 말하는, 비 전문가들의 '자존감'이라는 단어 사용에 관심이 있다. 정확히는 "자존감이 높다/낮다"하는 가치평가에 더 관심이 있다.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광범위한 이름에 경계하라
어떤 용어든 그것이 엄밀하고 정밀한 의미에서 소위 학술적으로 활용될 때와, 일상적으로 활용될 때는 그 지시 대상은 사뭇 다를 것이다. 특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그 용어가 활용된다면 더더욱. 가령 '철학'이라는 말을 보라. '철학비평' '철학원' '철학박사(Ph.D)' 기업의 '경영 철학'에서 모두 '철학'이라는 단어가 쓰이지만 그 의미는 모두 다르다. 학문 분과의 하나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점성술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학위의 종류가 이른바 순수학문이냐 아니냐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신념이나 지조 같은 걸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철학'이라는 단어가 우리 삶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쓰인다면, 그 각각이 뭘 가리키는 것인지 잘 구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특히 어떤 대상에 대해 가치평가를 할 목적으로 용어를 사용한다면 더욱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저 사람 철학을 잘 해" 라는 말을 보라. 만약 '철학'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사용한다면 이 말의 의미는 속된 말로 짬뽕이 될 것이다. 철학을 잘한다니, 날카로운 지성을 발휘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점을 잘 본다는 말인가? 신념이 굳세다는 말인가?
광범위한 이름으로 가치평가를 하는 일이란
'자존감'도 마찬가지다.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수준 이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이른바 일반인은 많지 않다. '자존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 "저 사람은 자존감이 높아" 하며 가치평가를 남발한다.
이런 식의 가치평가가 갖는 문제는, 전문적으로 보이는 어떤 세련된 개념에 기대어 자기의 가치평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대머리라 못생겼어!" 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alopecia(탈모의 학명)에 의한 appearance에 저하가 발생하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게 보다 '있어' 보인다. 꼭 어떤 사태에 대한 기술(記述) 혹은 특정한 규범에 대한 언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둘 다 그냥 외모의 트집을 잡고 있는 인신공격일 뿐이면서.
자존감 타령을 하기에 앞서,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보지 않은 채로 "쟤는 자존감이 낮아"하고 간단히 가치평가를 남발한다면, 그 말의 내용은 사실상 "쟤는 성격이 나빠" 수준의 단순한 인신공격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자존감을 행복의 필수조건이라 믿는다면, "쟤는 자존감이 낮아" 하는 말은 "쟤는 행복해질 수 없어" 수준의 강력한 언명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정교하지 못한 언어로 가치판단을 하는 결과, 그 판단은 맞지도 틀리지도 않게 되어버린다. 실로, 자존감 타령을 하기 시작하면 세상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르시시스트가 있다면, 자존감이 낮아서 저래. 의인이 있다면, 자존감이 높아서 그래. 애인에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존감이 낮아서 저래. 애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존감이 낮아져서 저래. 이 판단으로써 사실상 뭔가를 말하고 있긴 한 것인가? 참도 거짓도 아닌, 공허한 판단들만이 부유할 뿐이다.
이런 식의 저질의 가치판단을 마주친다면, 그 판단은 판단의 대상에 대해 말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판단의 주체에 대해 말해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쟤는 철학을 정말 못해. 글쎄 운세도 볼 줄 모르더라니까?"라고 누가 말한다고 해보자. 이 말을 통해, 평가의 대상이 점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만큼, 저 말을 내뱉은 사람이 얼마나 이른바 인문학에는 무지무식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도때도 없이 자존감이 낮다는 둥 높다는 둥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심리학에 얼마나 무지한지 광고하고 다니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으면 '자존감이 낮네' 하고 에둘러 말하는 대신, 그냥 속 시원하게 비난을 하자. 그게 자존감이 높아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