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공부만 해온 당신에게
남과의 경쟁을 위한 공부는 재미없다.
요즘 엄마들이 애를 두고 하는 걱정은 하나같이 공부에 관한 것들이다. 애들이 공부라면 학을 떼기 때문이다. 실로, '국영수'의 입시 공부는 별로 재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입시 공부는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호승심에 미쳐 날뛸 유소년기가 아닌 이상, 경쟁 자체에서 재미를 찾기란 어렵다. 남과 비교하는 일만큼 재미없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면 상대적인 박탈감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우와... 저 사람 좀 봐, 한 달에 1억씩 번대.. 상대적 박탈감이 엄습한다. 반대로 나보다 못난 사람과 비교하면 공히 자기위안을 얻게 될 뿐이다. 우와..덧셈 뺄셈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곱셈 정도는 못 해도 되지 않을까... 공허함이 엄습한다.
남과 비교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무익하고 무용하게 끝이 나고, 그렇기에 별로 재미가 없다. 다시 말해, 입시 공부는 '단지' 재미없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미가 없다. 말하자면 주방장이 각고의 노력을 들여 맛없게 만든 저녁 식사 같은 것이 바로 입시 공부의 정체다. 지난한 입시 공부 끝에, 대학에서 비로소 재미있는 공부를 가르치려 든다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이 맛대가리 없는 식사를 견딘 자만이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단다" 하고 말하는 심보 고약한 주방장 같다. 그러나 이런 식사 자리를 오래 견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사람들은 입시 공부를 한 입 맛보고는, 공부와는 일평생 결별을 선언한다.
그럼에도 한 번씩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라고 말하는 범생이들이 이따금 세상에 등장한다. 주로 '수능 만점'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 '엄마 친구 아들'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이 이런 막말을 뱉곤 한다. 사람들은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어요(쉬웠어요)'하는 말을 듣는다면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맛이 간 게 분명하군, 돌아이가 분명하군, 하고. 그렇다면 이들은 진짜 맛이 간 것인가? 진짜 돌아이인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타고난 싸움닭은 싸움이 재미있다.
실로,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타령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입시 경쟁을 시작하면서 빠르게 승리를 쟁취해낸 이들이다. 사람을 처죽이는 데 특화된 싸움꾼과 같이, 입시 공부에 뛰어들자마자 수많은 경쟁자들을 발 밑에 두는 데 성공한 이들이다. 적당히 주먹을 붕붕 휘두르기만 해도 파리떼처럼 적들이 죽어나가는 이에게 싸움이 재미없을 리 없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입시 체제 하에서 누가 뭐래도 타고난 싸움닭이었고, 입시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했고,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공부의 재미도 아니거니와, 권장할 만한 체험도 아니다. 타고난 재능으로 육편을 썰어대는 재미에 심취한들 언제나 더한 강자가 존재할 따름,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벽에 부딪히는 순간, 공부의 재미는 빠르게 반감되기 시작한다. 그 벽이 도저히 넘을 수 없을만큼 두텁고 높을수록 더더욱.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없을 때, 사람들은 흥미와 희망을 버리고, 희망이 버려진 불모지 위에는 소수의 '승리자'들만이 남는다. 입시 지옥의 한국의 현실에서 공부가 차지하는 위상이란 바로 이 불모지와 같다. 그럼 그 승리자들이 되면 되지 않냐고? 아니, 불모지를 독점해봤자 불모지는 그저 죽은 흙일 뿐이다. 불모지를 독점한 승리감에 지나치게 도취된다면 흙이나 퍼먹는 멍청이가 되고 말 것이다. 클럽에서 서울대 학생증을 내밀며 '헌팅'을 시도하는 자들처럼.
'진정한' 공부의 재미를 느끼려면
그러므로 한국 입시 지옥의 '승리자'들이든 희망과 흥미를 버린 다수의 학생들이든, 일정 시기가 지나면 죽은 흙을 퍼먹는 짓을 멈추고 '진정한' 공부의 재미에 천착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부의 재미란, 어리석은 과거의 나와 이별하는 일이다. 보다 섬세하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해가는 일이다. 익숙했던 대상으로부터 생경한 풍광을 포착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경험을 통해 사람은 꽤 괜찮은 삶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 체험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에 관해 정치학자 김영민은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산문집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호기심에서 출발한 지식 탐구를 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 공부를 통해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기대한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어차피 남이 아닌가. 자기 갱신의 체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
-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中
타인과 비교하는 대신,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는 것을 공부의 목적으로 삼는 이는 외부의 잣대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갖게 된다. 내신 성적, 수능 성적, 대학 학점, 자격증 점수 등 이른바 '스펙' 따위로는 환원되지 않는, 내면의 엄정한 잣대에 의해 과거의 자기로부터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지금 공부해야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강남에 집을 살 수 있고...' 하는 식으로 공부의 목적을 제안하는 일은 실로 바보같은 일이다. 이들에게 공부의 목적은 강남 아파트나 신분 상승 따위로는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모두 학생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學生(배우는 삶)을 영위하는 학생은 대단히 드물다. 특히 한국의 입시 지형은, 학생이면서 學生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들을 양산해낸다. 팔자를 고쳐먹을 수 있는 수단이 공부 말고는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팔자를 고쳐먹겠다는 목적을 잊고 잠시 배움의 재미에 귀를 기울여보라. 잠들어 있던 지성이 눈을 뜨고 완연한 學生을 전유할 수 있을 것이다.